새해가 밝았다. 2025년의 첫걸음은 다른 어떤 해보다 무겁게 시작 되었다. 작년 12월 초에 시작된 대한민국의 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게다가 연말의 비행기 사고로 많은 무고한 이들이 운명을 달리했다. 국가 애도기간 중에 새해의 태양은 떠올랐다.
연말연시의 떠들썩한 흥겨운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고국의 기운은 차갑고 어둡게 물들어 있다. 멀리서 타향살이 하는 이민자로서 이런 안타까운 뉴스들은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은 송구하고 감사하게 계속 되었다. 방학을 맞아 둘째 아이는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다. 한 명이 더 늘었는데도 북적대고 사람 사는 것 같이 집에 온기가 넘쳐났다.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떡국을 먹으며 첫날을 열었다. 매일 한국 뉴스로 어두워진 분위기를 잘 아는 둘째는 이야깃거리를 일부러 찾아 어린 시절 엄마의 새해는 어땠었는지 묻는다. 문득 나를 무척이나 아껴 주셨던 외할머니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웠다. 외할머니께서는 나를 참 예뻐 하셨다. 그 사랑이 느껴져서 항상 외할머니 앞에선 더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래서 외갓집 방문하는 것도 즐겁고 우리집에 오시는 것도 늘 환영이었다.
외할머니는 눈이 와 소복이 덮인 것 같은 새하얀 머리를 곱게 파마하시고 키도 아주 작고 등도 살짝 굽은 왜소하신 분이셨다. 우리집에 오실 때면 센스있게 내가 좋아하는 김 묻어있는 옛날 과자나 뉴욕제과의 롤케이크를 사오셨다. 기기성복이 흔치 않던 시절, 양장점에 데려가 멋진 옷도 위, 아래 세트로 맞추어 주셨다. 유치원 때 사진을 보면 한껏 차려입고 깜찍한 표정을 짓는 내가 등장한다.
외갓집은 언덕 높은 곳에 새로 지은 넓은 이층집이었는데 잘 가꿔진 정원이 있었고 바로 앞에는 동네 놀이터가 있어 사촌들과 놀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엄마와 택시를 타고 갈 때면 난 어린 나이에 일부러 뽐내듯 할머니 댁에 뛰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면 택시 기사님들이 집이 참 좋네요라고 말씀하셨다. 으쓱하며 대문을 열고 들어가 할머니를 큰 소리로 외치곤 했다.
설날이면 외가 식구들이 다같이 모여 세배를 나이 순서대로 가족별로 나와 드렸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덕담을 얌전히 듣고 세배돈을 받아 들고는 베시시 웃음 지으며 서로 얼마 받았냐고 경쟁하듯 자랑했다.
외갓집에서 먹던 설음식에는 항상 떡만두국이 나왔다. 아주 잘 익은 김치로 만든 작고 알차게 빚은 만두, 진한 육수와 정갈하게 얹은 고명까지 맛을 더했다. 게다가 이북출신의 외할머니는 수수부꾸미를 전기 후라이팬에 기름 넉넉히 두르고 팥소를 넣어 맨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만들어 주셨다. 그 장면과 기름진 수수부꾸미의 달콤한 팥맛이 아직도 기억난다. 식혜는 탁한 회색빛이 아닌 하얗고 맑은 색에 밥풀도 눈송이처럼 동동 떠올라있었다.
서른명 가까운 대가족의 식사와 후식까지 마무리 되면 손자 손녀들의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쑥쓰럽지만 으례히 하는 것처럼 용기를 내어 각자의 장기를 선보이며 명절을 준비하던 어른들의 고단함을 즐거움으로 보답해 드렸다. 그저 철없이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썩하게 보냈던 그리운 시간들이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한가득 음식 보따리를 싸서 자식들에게 들려 보내시고 차가 언덕을 내려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셨다.
그런 따스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금도 나를 포근하게 만들고 아이들에게 내리 사랑을 내어 주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치매를 앓으셨던 외할머니는 크나큰 사랑과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로 남겨주시고 당신은 점차 기억을 잃어버리신 채 우리 곁을 떠나셨다.
한국의 어지러운 기사들을 많이 전해듣는 요즈음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대의를 져버리는 안타까운 뉴스들 뿐이다.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강산 뿐만 아니라 우리의 따뜻한 정과 평안한 일상을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외할머니의 푸근함이 유독 그리운 한 해의 시작이다. 지금은 건물이 들어서 없어져버린 그 옛날 외갓집에서 모두 모여 가족애를 나누며 떠들썩하게 웃고 싶은 우울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