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11
아일랜드의 조용한 어느 마을, 회색빛 하늘과 첨탑사이로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 영혼을 정화하는 미사의 종소리에 마음을 뺏기려는 순간, 비웃듯 까마귀들이 까악 거리며 흐린 하늘을 날아다닌다. 주인공 펄롱은 오늘도 석탄을 배달하느라 바쁘다. 온 마을과 관공서는 물론 수녀원에서도 펄롱의 석탄을 기다린다.
수녀원으로 배달을 간 펄롱은 석탄창고에서 눈물과 오물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한 소녀를 본다. 갓 나은 아이를 빼앗기고 감금되어 있는 소녀의 가슴께는 흘러나온 젖으로 얼룩져 있었다. 수녀원장은 입막음으로 펄롱에게 돈봉투를 건네는 회유와 함께 은근한 협박을 한다. 펄롱은 침묵과 저항 사이에서 갈등한다. 영화는 대사보다 장면마다 검정 필터를 입힌 듯한 선명한 명도로 암울한 현실속의 갈등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검은 석탄과 검은 물은 펄롱의 골진 광대와 움푹 패인 눈그늘로 이어지며 답을 알수 없는 어둠속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그리고 선택에 대한 답을 관객에게 묻는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영상화 한 이 작품은 실제 존재했던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벌어졌던 비인간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시 아일랜드의 가톨릭교회는 공권력과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성에 대해서는 특히 더 엄격해서 미혼모나 성소수자, 성폭력과 가정 폭력 피해자들은 훈계와 보호의 명목으로 막달레나 세탁소로 보내졌다. 심지어 부모들까지 자신의 치부를 감추듯 아이들을 그곳에 방치했다. 수녀원에서는 ‘교화’ 라는 이름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극한 노동을 시켰고 미혼모의 아이를 물건 팔듯 돈을 받고 입양시켰다. 끔직한 인권유린이 안식처가 되야 할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던 사건이 세상에 나오면서 많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 주기도 했지만 아일랜드 가톨릭교회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침묵의 한가운데 들어선 펄롱은 갈등 중에도 소녀를 선택한다. 가난한 힘없는 개인이 거대한 힘을 가진 종교기관의 비리에 맞선 것이다. 아니 맞선 것이 아니라 양심에 따른 인간적인 행동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펄롱은 수녀원장의 한마디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 사람들은 가족의 생계와 딸들의 미래까지 불안으로 몰아 넣는 그의 행동을 보며 혼란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아무 연관도 없는 소녀를 구하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만큼 가치있는 일일까 하면서도 왠지 외면할 수 없는 찝찝함으로 혼란스러워진다. 살다 보면 부당한 일을 보고, 듣고 실제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한다. 침묵에는 또한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나름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사유들이 펄롱으로 인해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이 탄핵으로 시끄럽다. 12월3일 계엄이 선포되던 시간 스웨덴에서는 한강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은 폭력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침묵을 거부한 작가의 작품은 불의에 침묵하는 많은 이유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치졸한 자기 변명인지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작가는 슬쩍 눈 감았던 우리의 양심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이토록 폭력적인데 또 왜 이리 아름다운가” 묻고 있다.
이 물음은 우리를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으로 몰아 넣는다. 동학혁명에서 4.19 거사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대중이었다. 한명의 희생이 다른 한명의 희생을 만들고 또 그들이 모여 민중의 힘으로 거듭나 왜곡되어 가는 역사의 흐름에 한 획을 그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광장에는 과거의 선조들이 다시 등장했다. 희생의 후손인 우리는 선조들이 흘린 피를 유머와 위트로 살려내며 부당한 정치에 저항하고 있다. 미미한 개인은 아무 힘이 없는 것이 아니었고 사소한 것들은 결코 사소한 것들이 아니었다.
어두운 거리, 소녀를 데리고 걸어가는 펄롱을 향해 마을 사람들은 수군대며 눈을 떼지 못한다. 펄롱과 소녀는 묵묵히 걸어 집으로 들어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하지만 왜 라는 의문을 품은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펄롱의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2024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을 때, 하루쯤은 자신의 목소리에 가슴을 내주고 싶어질 때 이 영화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