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한국학교 학생 대상 한인 정체성 조사
한·미의 이중적 정체성은 “갈등 아닌 축복” 인식
한류 문화적 정체성이 ‘정치력 확대’ 이슈 압도
“이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아요.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최근 본지가 애틀랜타 한국학교를 방문해 ‘한인 차세대 정체성’을 주제로 가진 좌담회에 참석한 15명의 중·고교 학생들은 이중의 인종·문화 정체성을 족쇄보단 축복으로 여겼다. 과거와 달리 글로벌 문화 콘텐트 교류가 활발해지며 정서적 차이가 크게 희석된 결과로 보인다.
이들은 이중적 정체성을 타인에 대한 소통과 이해의 확장, 성공 기회로 인식했다. 한 학생은 “두 나라의 문화가 충돌한다기보단 이 문화도 흥미롭고, 저 문화도 재밌어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두 배가 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양국 정체성 속 갈등을 겪고 있다’고 응답한 한 명을 제외하고 14명이 모두 ‘이중 정체성을 감사하게 여긴다’고 답해 정체성 혼란보다는 통합적 인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 스스로 한국 문화와 연결고리를 강하게 또는 어느정도 느낀다고 답한 학생도 13명에 달했다.
이들이 느끼는 ‘문화의 힘’은 기성세대가 강조하는 ‘한인 정치력 확장’ 이슈를 뛰어 넘는다. 참석자 모두는 “한국계 정치인보다 가수, 배우 등 연예인이 한인 정체성의 긍정적 인식에 더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한 학생은 “연방 차원에서 활동하는 한인 정치인의 상징적 의미에 공감이 된다”면서도 “한인 주 의원이 많아지면 한국계 실익도 높아진다는 공식에서는 합리적 판단이 안 선다”고 지적했다. 자랑스러운 ‘K’를 묻는 질문(복수응답)에도 K-푸드(11명), K-팝(8명), K-드라마(7명) 순으로 응답이 높았다.
학생들의 이같은 인식 변화는 미국 내 한국의 문화적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결과다. 한인 이주사를 연구한 조지연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교수(아시안학)는 “또래집단이나 사회 주류에서 한국 콘텐트를 치켜세워주는 경험은 성장기 긍정적 자기 인식을 형성하게 된다”고 밝혔다.
“과거 한국적 가치를 폄하 또는 절하하던 시기와 달리, 지금의 청소년들은 부모로부터 한국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면 조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거나, 대학에서라도 한국어 수업을 찾아 배우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AI 번역기술이 발전하며 중국어, 아랍어 등 주요 외국어를 익히는 인구가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지만, 교육현장에서 체감하는 한국어 수요는 오히려 크게 늘고 있다.
차세대가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본국의 사회적 스트레스와 지나친 경쟁 강도다. 학생들 모두 친인척이 거주하는 ‘뿌리’로서의 한국에 잠시나마 살아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학업이나 직장 생활을 하고 싶다는 응답자는 없었다.
한 학생은 “학생의 진로 선택과 학습 자율권을 폭넓게 인정해주는 미국 고등학교와 달리 한국은 부와 명예에 대한 사회적 부담을 학생에게 과하게 지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도 “과거와 달리 인종차별이 옅어진 지금,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갖는 것이 향후 성공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물었을 때(복수응답), 선도적(11명), 혁신적(11명)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지만, 그 이면에는 경쟁적(8명), 숨가쁘다(8명), 민족적(8명)이라는 진단도 나타났다.
조 교수는 한인 정치인, 기업인들이 차세대 롤모델이 돼 주지 못하는 것을 한계점으로 꼽았다. 그는 “실효성 있는 장학사업을 벌이는 인도 등 남아시아 이민사회와 달리 한인사회는 장학기금과 멘토십 교류에 있어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3세대는 대부분 영사관이나 한인회가 무얼 하는 기관인지 모른다. 이런 단체들이 의례적인 추석, 설 명절 행사만 열 것이 아니라 차세대 교육의 장으로서 과학 엑스포, 미술 박람회, 커리어 캠프를 개최하는 데 더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좌담회 참여자(한국명·학년순)=이윤아(헐중 6학년), 성온유(노스귀넷중 6학년), 조경민(리중 7학년), 장영은(웹브릿지중 8학년), 성지유(노스귀넷중 8학년), 안서연(밀크릭고 9학년), 김이수(월튼고 10학년), 정하은(IVLA 11학년), 유예원(피치트리릿지고 12학년), 김예나(셰킹어고 12학년), 한하은(피치트리릿지고 12학년), 조건희(귀넷과기고 12학년), 최은식(귀넷과기고 12학년)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