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다. 아직 채 완성하지 못한 원고와 펜을 손에 든 채 피로 가득 찬 욕조에 몸을 기울이고 있는 한 혁명가가 있다.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인 ‘마라의 죽음’이다. 다비드만큼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담아낸 화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프랑스대혁명의 격동기를 살았고, 혁명의 격랑 한가운데 속해 있었다. 그의 ‘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 중에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사건을 기리고 있다.
냉철한 혁명가로 언변이 뛰어나고 선동에 능했던 마라는 로베스피에르, 당통과 함께 프랑스대혁명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이끈 주역이었다. 그러나 반대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은 공포와 함께 원한을 불러일으켰으며, 급기야 그는 자택에서 목욕을 하던 중 코르데라는 24세의 처녀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혁명의 피에타라 평가받을 만큼 통렬한 비극적 사실주의를 구현한 ‘마라의 죽음’은 마라에 대한 민중의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가 행한 모든 정치적 폭력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이렇듯 이미지의 힘은 때로는 역사적 기억보다 강력하다.
암살자 코르데는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며 “나는 이 사나이 한 명을 죽임으로써 프랑스 인 10만 명을 살렸다.”고 당당하게 진술했다. 마라가 죽은 나흘 후인 1793년 7월 17일 열린 재판에서 코르데는 사형을 선고 받고 곧바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죽기 직전, 감옥에서 그녀는 화가 장-자크 오에르를 위해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프랑스혁명의 잔다르크였다. 단두대로 향할 때 동승했던 사형집행인 상송은 훗날 이렇게 적고 있다. “그녀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강하게 매료되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처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저렇게 의연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10만명의 프랑스 민중을 구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코르데와 그녀에 의해 암살된 마라가 정치적 이념에 따라 순교자의 위치가 바뀌고 예술작품의 선호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 시대와 정치 사회적 지형에 따라 예술은 유동하며 그 가치와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을 창조하는 것은 화가이고, 그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관객이다. 화가가 자신의 시선과 삶을 담아 동시대를 관통하거나 시대에 저항하는 미학과 가치를 담아냈다면, 관객들 또한 자신의 시대와 정서에 맞춰 그림을 감상한다. 다비드의 . ‘마라의 죽음’은 가장 정치적인 그림이다. 이 그림으로 마라는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 궁정화가가 되어 나폴레옹의 철저한 정치적 하수인이 된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 대관식’ 역시 명화에 정치의 색을 입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노트르담 대성당 안에서 나폴레옹이 부인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참석자들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황제 바로 뒤에 앉아있던 교황 비오 7세가 오른손을 들어 이를 축복하고 있다. 정말 그랬을까. 물론 아니다. 화가의 충성심과 황제의 오만함이 합작해 만든 허구의 대관식 장면일 뿐이다. 잘 알려진 대로 나폴레옹은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빼앗아 스스로 머리에 썼다. 다비드는 이 불경스런 상황을 직접 목격했지만 황제가 황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곤혹스런 장면은 덮은 채 화려한 대관식 그 자체만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왕당파가 재집권했다. 승승장구하던 다비드의 운명도 바뀌었다. 왕정과 공화정, 제정까지 40여 년에 걸쳐 최고 권력자의 옆자리를 지킨 다비드는 자신에게 강한 반감을 품은 왕당파를 피해 브뤼셀로 망명했다. 권력자의 의도를 간파하는 탁월한 능력과 그것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능력과 탁월한 처세술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바로 그런 재주로 인해 다비드는 프랑스 역사에서 대표적인 부역자이자 배신자의 딱지가 붙었다. 그의 그림들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에서 ‘영광’은 사라졌다. 그는 고난을 피해 성공의 꽃길만 선택했고 권력의 양지만 좇은 권력의 해바라기로 낙인찍혔다. 겨울을 견뎌야 봄꽃은 세상과 만난다. 삶도 고난을 통과하면서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좌파에는 한가지 원칙이 있다. 배신자는 언젠가는 처단한다는 룰이다. 반면 우파에는 배신자를 숙청하는 원칙이나 그런 전통, 기강이 없다. 그러다 보니 항상 대사를 앞두고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개판 5분 전이 된다. 그러고도 나중에는 아무 일도 없다. 뭐니 뭐니해도 한국 현대사의 중심 테마는 ‘좌와 우의 사생결단’이다. ‘한동훈 현상’은 하나의 부수적인 해프닝에 불과하다. 이런 해프닝이 이번에 처음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돼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배신자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나는 좌파가 아니다. 그러니 우파도 아니다’라고. 그들은 ‘중도’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말이 ‘중도’이지 실은 좌파에 밀리기로 한 우파다.
한국의 정치계절은 어김없이 변절과 배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해관계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권력의 불나방들’이 제철을 만났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계층을 살펴보면 정치계와 종교계가 별로 다르지 않다. 하루 사이에 얼굴색을 바꾸기는 손바닥 뒤집기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는 배신의 강도에서 막상막하다. 차이는 스물일곱 번의 칼질과 은전 30냥이다. 배신은 아프다. 분노에 치를 떨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신을 증오한다.
배신자들이여 ,역사의 법정은 그대들에게 두고두고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역사는 이제 기록보다는 집단기억이 되어가고 있다. 과거 기록은 승자의 선택적 기록이었지만, 다수와 집단의 기억은 기억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변형되어 그 자체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기록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자 새로운 형식의 역사 기억이다. 과거처럼 힘들게 역사의 기억에 세울 것 없이 ‘집단기억의 법정’에 수시로 소환하여 질타한다. 뭇매는 기본이다. 역사는 더 무서워졌다. 이것이 천리(天理)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