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길, 봄을 향해 손짓하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수술 날짜를 받아두고 기다리던 긴 시간, 어느새 수술자리의 통증을 감싸 안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 있다. 눈에 익은 바깥세상이 마치 처음 보는 풍경처럼 새롭게 느껴졌다. 아름다웠다. 그사이 올라간 기온에 가로수 아래 마른풀들은 새 생명을 싹 틔울 준비를 하며 단비를 마시고 있다.
추운 날씨를 떠나 보내기 위한 인사를 하듯, 내리는 겨울비는 창가에 진눈깨비처럼 부드럽게 앉았다. 차갑고 쓸쓸하게만 느껴졌던 겨울비가 그동안 수고했다는 속삭임처럼 들렸다. 어떻게 이 시간을 지나왔는지 모를 만큼 힘들었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마치 따뜻하고 포근한 손길이 아기를 달래듯 나를 감싸며 토닥이는 것 같아 울컥했다. 내 안에 겨우내 숨어있던 싹이 기지개를 켜며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퇴원해서 집으로 가는 길은 벅찬 설렘이었고 새로운 희망이었다. 나를 마중 나온 겨울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여름이 시작될 무렵, 암 진단을 받고 두 번의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내 삶을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돌려세운 시간이었다.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상황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 두려웠고, 뜻하지 않은 공포와 통증, 앞날에 대한 불확실함이 나를 감쌌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겸손함을, 감사함을, 그리고 소중함을… 무엇보다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이 있었고, 나눔의 가치를 배웠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간지럽게 다가오는 바람에도, 화창하고 청아한 날씨가 자연으로 유혹하는 날에도 내 세상은 작업실이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창밖으로 하루하루 변하는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내 몸과 마음을 재무장했다. 무엇이든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흘려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의 치료가 필요 없으며 앞으로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내 안에 숨었던 나약한, 지극히 인간적인 세포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위로받고 싶었던 걸까. 창에 맺히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졌다.
어느 날은 세찬 바람과 함께 내리는 겨울비가 친구가 되어주었다. 나는 세차게 내리는 빗방울을 좋아한다. 창을 두드리며 흘러내리는 물방울 속에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스며들며 흘러간다. 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 바닥에 고이면 다시 흩어지고 고이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는 시간은 나에게 휴식이 된다. 마치 뇌를 재설정하는 순간처럼,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바라보게 만든다. 흔히들 ‘불멍’이라 하지만, 나는 ‘물멍’을 하며 위안을 얻는다.
어느 날은 겨울비가 선물처럼 내게 왔다. 이곳 날씨에 걸맞지 않은 한파가 몰려왔던 날. 눈 예보가 있었다. 하필 그날은 수술 예정일이었다. ‘눈이 온다고? 어차피 잠깐 흉내만 내다 사라지겠지. 진눈깨비 정도 날리다 비가 오겠지. 언제나 그랬으니까.’ 하얀 눈가루를 뿌리지 못해 슬픈 듯, 이곳의 겨울비는 눈물처럼 떨어졌다. 진눈깨비도 보기 힘든 겨울이었기에 함박눈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황당하게도 그런 동네에서 눈 예보 때문에 기다렸던 수술이 갑자기 취소되고 열흘 뒤로 다시 잡혔다. 남편도 일정을 맞췄는데, 눈이 안 오기만 해 봐라… 그동안 잘 참아온 것까지 더해져 짜증이 올라왔다.
그러나 내 예상을 깨고 다음날 눈이 내렸다. 곧 비로 바뀔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굵어지는 눈발이 제대로 된 눈을 구경 시켜주듯 세상을 하얗게 지워가고 있었다. 앞마당과 뒷마당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투정 부리던 마음도 사라졌다. 녹아 내린 내 마음은 어느새 눈밭을 뒹굴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걸어둔 모이통 주변에는 더 많은 새들이 모여들어 신이 났다. 평소보다 더 큰소리로 재잘거리며 모이통 주위를 날았다. 앙상한 나무들도 솜이불을 덮은 듯 따뜻해 보였다. 창가에 붙어 서서 붙박이가 된 채, 조금씩 쌓여가는 눈을 동영상 촬영하듯 마음의 창을 열어 내 속에 저장했다.
친구처럼, 선물처럼, 위로와 휴식처럼 다가왔던 겨울비가 지나가면, 계절은 어느새 봄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 비가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땅을 적시며 생명의 봄을 준비하듯, 내 안의 아팠던 시간도 흘러가, 한층 더 단단해진 나를 봄으로 데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