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의 골콘다를 보다
까만 모자와 까만 레인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비처럼 내려오고 있다. 까만 빗방울들이 하얀 눈 속에 박힌 기억처럼 선명하다. 그림은 하양, 검정, 붉은색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도였다. 흐릿하거나 아련한 느낌 없이 분명한 색채였지만, 나는 그것이 왠지 모르게 더 슬퍼 보였다. 빛바래고 오래된 것들이 서서히 사라져 하얀 바탕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허무함이 느껴졌다.
르네 마그리트가 1953년에 그린 ‘골콘다(Golconda)’ 라는 그림이다. 중절모에 레인코트를 입은 신사들이 하얀 하늘에 검은 물방울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가, 막 떨어지려는 순간을 포착한 듯 그림은 생생했다.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이 무한히 복제되어 끝없이 맴도는 것 같기도 했다. 중세풍의 건물과 스미스 요원의 조합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듯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골콘다는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과거 어느 왕조의 수도 였던 곳으로 인도 텔랑가나 주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다.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으로 무역의 중심지였던 그곳은 막대한 부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채 지금은 폐허가 된 도시이다. 나는 과거의 찬란함을 끌어 안고 사는 처량한 늙은이의 모습같은 도시를 떠올렸다. 영원할 것 같았던 한때의 영광과 변치 않을 것 같았던 사랑의 맹세를 담은 기억들이 비가 되어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투둑 투둑, 빗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빗방울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을까. 청년의 손 위에서 떨고 있는 구애의 반지, 화려한 쇼윈도에 비친 욕망들, 꺼질 줄 모르는 선술집의 붉은 불빛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많은 사연을 담은 빗방울들이 먼 길을 돌아 지금 여기에 내리고 있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고 명확하게 쐐기를 박듯, 선명한 검은색 비로 상실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었다.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지상으로 떨어지는 골콘다의 신사들이 보였다. 문득 나 자신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골콘다에서 다이아몬드를 캐던 사람들의 소망처럼, 찬란함으로 가슴떨렸던 시절이었다. 한때는 모든 것이 선명했고, 마치 시간이 내 편이라도 되는 듯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곳곳이 하늘을 보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발밑의 땅을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골콘다의 신사처럼 나도 비내리는 겨울의 한 가운데 서 있는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골콘다에는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영광의 찬란함이 아닌 과거의 시간을 지닌 그곳을 찾는다. 폐허가 된 땅에서도 시간이 쌓이고, 그 시간 속에서 골콘다는 또 다른 모습을 만들고 있다. 과거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현재의 도시로 남아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시간의 위대함을 느끼며 영광이 지나간 황량한 노을의 찬란함을 만난다. 주름 진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듯 나 역시 그렇게 변화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거꾸로 돌렸다. 땅에서 하늘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림을 올려다 보았다. 골콘다의 신사들이 하늘에 떠 있었다. 신사들 모두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비스듬히 서 있는 신사마져 눈은 앞을 보고 있었다. 마치 두고 온 영광은 잊겠다는 듯 어느 누구도 뒤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미처 보지 못한 선명한 피부색이 보였다.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가장 나를 닮은 분명한 피부색이었다. 찬란한 흰색과 상실의 검은색, 그리고 안타까운 붉은색을 뚫고 피부색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겨울비 뒤에 찾아 오는 봄의 초록이 보였다.
빗방울이 가지에 맺혔다. 그것들은 그림의 색들과 함께 시공을 돌아 까만 비로 후두둑 떨어졌다. 모든 색이 합쳐지면 만들어지는 까만색. 어둡고 음울한 검은 색이 아닌, 윤기 가득 반짝이는 까만색이었다. 정적을 가르는 그 비들이 이제는 더 이상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빗줄기 속에서 나는 지나온 시간들을 받아들이고, 흩어진 기억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마치 사라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렇게, 까만 겨울비가 지나간 자리에는 분명 새로운 봄 빛이 내려 앉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