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목련이 핀 것을 보고 즐긴 것은 잠깐이었다. 불쑥 들이닥친 꽃샘 추위에 보랏빛 꽃색깔이 갈색으로 변해버렸다. 빛과 그림자였다. 거무죽죽하게 떨어진 목련 꽃잎에 마음이 스산해서 가든숍에 들렸다.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화끈한 색깔의 앙증스런 꽃 그림이 내 시선을 끌었다. 네덜란드산 구근들이 담긴 패키지였다. 구근 뭉치를 집에 들고 와서 나는 까마득한 옛 추억에 빠져들었다.
오래전 네덜란드의 명소, 쾨켄호프 정원을 방문했었다. 튤립축제로 붐볐던 4월의 어느 날, 차가운 기운에 두터운 자켓을 입고 찾아간 정원의 입구 주변에서 멀리 풍차를 배경으로 말끔하게 정리된 거대한 튤립 들판에 시야가 확 열렸다. 일사불란하게 끝없이 이어진 꽃밭이 위압감을 줬고 풍차를 배경으로 넓게 퍼져 있던 튤립 밭고랑을 달리고 싶은 충동을 받았었다.
1950년부터 일반에 개방하는 쾨켄호프 정원은 80 에이커의 넓은 지역이다. 해마다 7백만 구근을 심어서 함께 피어나도록 준비한 노력의 결과는 방문자를 압도한다. 그때 나는 다양한 색깔의 매혹적인 꽃들에 눈이 시리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많이 본 튤립에 “아름답다” 보다 “놀랍다!” 경탄했었다. 싱그런 푸른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서 양쪽으로 멋지게 디자인된 튤립과 히아신스 그리고 수선화의 조화를 보고 호수에 정물 같던 백조들에 반했었다. 천연의 거친 야생화 들판과 전혀 다른, 모양과 색깔을 세심하게 고려해서 마련한 인간의 멋진 창작품인 조경정원은 진실로 세상에서 가장 큰 꽃밭이었다.
그리고 몇 실내 전시관에서 본 진달래 등 봄꽃들의 맵시에 눈이 부셨고, 또한 여러 색깔의 크고 작은 장미꽃들의 재치 있던 이름을 보며 미소를 멈추지 못했다. 유럽 왕실의 우아함을 가졌던 소담했던 장미 꽃송이의 멋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봄의 향연으로 가득했던 구비구비 길 양옆으로 예쁜 그림을 만든 많은 꽃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때 함께 둘러봤던 치즈 공장과 나막신 공장이 떠올랐다. 샘플로 먹어본 고다 치즈에 반해서 노란 왁스로 코팅된 고다 치즈 덩이를 사 갖고 와서 맛있게 먹었던 후부터 우리 부부는 고다 치즈를 즐겨 먹는다.
집안 어딘 가에 기념품으로 보관했던 풍차가 그려진 귀여운 나막신이 생각나서 찾아 내놓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남편에게 “이것 손주가 오면 주려고” 설명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우리가 암스테르담에 두 번 갔었는데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그는 단번에 홍등가인 ‘레드 라이트 디스트릭’을 말했다. 길게 몇 블록 늘어선 건물들의 창가마다 판매품으로 앉아있던 여인들을 떠올린 남편에게 우리가 찾아봤던 안네 프랑크의 집과 반 고흐의 미술관은? 하고 묻는 내가 오히려 우스웠다.
그래서 남편에게 네덜란드 서부에 있는 헤이그에서 봤던 철문이 엄중하게 보호하던 붉은 벽돌 건물, 국제사법재판소와 네덜란드의 관광 명소를 축소해서 만든 건물들로 만든 모형 마을, 마두로담 미니어처 공원을 상기시켰다. 그때 찍었던 사진들이 있는 앨범을 보여줄까? 했더니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30대 뭐든 욕심낸 열정적인 여자였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본 물이 새는 둑을 막아 나라를 구한 소년의 이야기로 네덜란드는 다정다감한 나라로 내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 나라의 명소를 골고루 직접 찾아가 보았으니 흥분 했었고 고흐의 그림을 실제 본 것에 많이 행복 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니 예전에 발로 뛰며 찾아가 흥분했던 지역의 아름다운 정경이나 명소 보다 더 아련한 곳이 있다. 네덜란드 해안가 작은 마을인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그곳을 찾았던 것은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 어느 날 이었다. 한적한 바닷가 작은 마을이었고 앙상한 돛대에 걸린 낡은 천이 눈발에 펄럭이던 어선이 몇 흩어져 있던, 환상적인 정경에 내가 어울려 그림을 만든 곳이다. 털모자와 목도리에 두터운 오리털 코트를 입고도 추웠지만 찬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만나러 해변가로 용감하게 다가갔던 순간을 나는 가끔 회상한다. 그것은 내가 사는 삶의 자세다.
햇볕 따스한 날, 옛 생각을 하며 네덜란드의 명물인 스트룹와플을 먹었다. 그리고 크로코스미아 구근들을 뜰에 심었다. 이제 매일 물 주고 다독이면서 뿌리를 내리고 세상으로 고개를 내밀 선홍빛 꽃들을 기다린다. 여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