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蘭 )한 분이 곁에 있기라도 하면 그 방안 전체 분위기를 일순간에 변하게 하는 그 청정한 생명력을 아는가. 작은 풀 포기 같은 생명체가 발산하는 무한한 에너지는 마냥 신비스럽기만 하다. 사시장철 변치 않는 고고한 자태와 잎이 그려내는 우아한 곡선미. 깊고 그윽한 향기. 그리고 언뜻 스치는 신비로움에 보이지 않아도 느끼는 언어. 그러기에 난을 가리켜 기다림을 아는 식물이라고 했다. 기다릴 줄 알게 하기에 우리의 성정(性情)까지도 변하게 하는 것이 난이라고 했다.
잔설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주위를 맑게 하는 난초, 늦가을 모든 꽃들이 시들어갈 때 꿋꿋이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 칼날 같은 눈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이 네 가지 식물은 한결같이 그 생태가 군자의 그것을 닮아,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라 부른다.
얼마 전 시니어센터의 지인으로부터 양난 한 분을 얻어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 고고한 자태에 취하여 가만히 들여다 본다. 화사한 꽃은 마치 얼굴을 부끄러이 내민 여인네 같다. 난은 잎이 그리는 선의 멋이 아름답고, 비집고 오르는 촉의 아망과 대공이 자라는 우아와 자줏빛 꽃대에 달린 봉오리의 맺음과 벌음, 그리고 꽃대에 갈무린 암팡진 꽃의 미소가 볼수록 좋다. 난은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귀한 자태로 향기를 내뿜는다. 난초는 청초한 잎이 그려내는 부드러운 선, 영묘하기 그지없는 꽃 모양과 색채. 참으로 우미수려(優美秀麗)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난에는 군자의 기품이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난을 가리켜 ‘왕자의 꽃’ ‘군자의 꽃’으로 비유했는지도 모른다.
난은 우선 그 잎이 멋지다. 부드럽게 휘어지거나 아니면 시원스럽게 뻗은 것이 어디 한 군데 궁색한 데가 없다. 고집도 무리 없이 우아하고 단아하며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다. 난초 잎은 휘어져도 품격이 있다. 꽃으로 화려하려 하지 않고 잎으로 청초하게 한 생을 살다 가는데 열 잎이 꼿꼿해도 한두 잎은 휘곤 한다 그러나 휘어져도 격을 잃지 않는다. 휘어져도 저를 키운 시간을 다 버리지 않는다 가만히 난을 들여다본다. 난초 화분의 휘어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댄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난초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다. 그들 사이에 사람인 내가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이 흐른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주빛 붉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우로(雨露)를 받아 사느니라.”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난초’다. 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난의 외양과 성품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이 작품은 시인이 소망하는 정신적 삶의 방식을 통해 현대인이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를 일깨워준다.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는 난초를 두고 그 외모의 수려함과 그 내재적인 본성을 예찬하면서, 고고한 삶을 영위해 보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티끌도 멀리하고 이슬만 마시고 사는 난초의 삶’이란 곧 선비의 깨끗한 삶의 이상이었다.
난은 그 자태가 고아하고 잎이 청초하고 향기가 깊고 그윽하며 기품이 우아하다. 말하자면 운치를 아는 선비와 같다. 난은 우리의 마음을 향기롭게 하며, 여유와 운치 그리고 기품있는 인내심을 가르친다. 난은 우아와 운치를 중히 여기던 선비문화의 꽃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옛날부터 선비의 방에 반드시 난초 화분을 놓았다. 그것과 함께하면서 군자의 덕을 기르라는 뜻이었다. 사대부들이 사군자를 즐겨 그린 것은 식물 자체가 아닌 그것으로써 상징되는 인격이었다.
지란지교(芝蘭之交)는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의 교제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맑고도 고귀한 사귐을 이르는 말이다. 공자는 지란지교를 이렇게 설명한다.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향기 그윽한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향기는 맡을 수 없지만, 자연히 그에게 동화되어 착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마치 악취가 풍기는 어물전에 들어간 것 같아서 그와 함께 오래 지내면 비록 그 악취는 맡게 되지 못할지라도 그에게 동화되어 악한 사람이 된다.” 유안진 시인은 지란지교의 사귐을 맛깔나는 필치로 이렇게 표현한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열어 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그가 여성 이어도 좋고 남성 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난초는 숲속에서 자라나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향기를 풍기지 않는 일이 없고, 군자는 곤궁함을 이유로 절개나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다. 난초는 탁류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지향점을 일깨워주는 스승 같은 화초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 다시 ‘난초’를 읊조려본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