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몸사리기로 채용 취소, H-1B 받기도 어려워
E-4 비자 12년째 논의만…한국정부·기업 로비 절실
#. “죄송합니다. 귀하의 채용이 취소되었습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원하던 회사에 채용돼 매일 축제같은 나날을 보내던 한인 A씨는 올해 초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채용 확정 두 달 만에 취소 통보를 받은 것이다.
회사 측에 이유를 물었더니 “졸업 후 현장실습(OPT) 프로그램 기간이 끝나면 어떤 비자로 미국에 체류할거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회사 측이 A씨 채용을 확정할 때부터 비자 상황을 알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황당한 질문이었다. 결국은 전문직 취업비자(H-1B) 스폰서를 해주고 싶지 않아 채용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A씨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반이민 정책이 강화되자 생각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며 “취업비자가 없는 다른 친구도 최근 같은 이유로 타 회사에서 채용 취소 통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처럼 기업들은 H-1B 스폰서가 필요 없는 영주권자나 시민권자, 합법 취업비자를 가진 사람들 위주로 채용 정책을 바꾸고 있다.
▶더 높아진 한인 취업장벽= 전문직 한인의 안정적 취업을 위한 전용 비자의 필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많은 기업이 눈치를 보며 외국인 채용을 꺼리고 있는 데다, 최근 공화당에서는 지금도 당첨되기 힘든 H-1B 비자 발급을 줄이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어서다. 이민서비스국(USCIS)에 따르면, 2023년 기준 H-1B 비자 근로자의 4분의 3은 인도 출신, 12%는 중국 출신이다. 만약 전체 H-1B 발급규모가 줄면 취업을 희망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설 자리는 더 좁아진다.
OPT로 취업한 유학생 출신 한인의 상황도 좋지 않다. 직장인 B씨는 “OPT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곧 회사에 H-1B 스폰서를 요청해야 하는데, 지인이 회사 측에 문의했다가 해고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겁이 나서 못 물어보겠다”고 밝혔다.
B씨는”전에는 한국인 전용 전문직 취업비자(E-4비자)가 있으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간절한 상황”이라며 “능력 있는 한인들이 신분 때문에 역량을 펼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 특성상 한국어를 구사하고 문화를 아는 직원이 필요하지만, 채용할 방법이 많지 않다. 뉴저지주에 위치한 한 글로벌 한국기업은 “조건이 조금 떨어져도 웬만해선 H-1B 비자가 필요없는 직원을 채용해 문제될 여지를 없애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끼리 모여’ 12년째 헛수고= E-4비자 법안은 2013년부터 매회기 연방의회에 발의됐지만, 매번 폐기됐다. 처음 발의된 2013년엔 연방하원 공동 발의자가 111명에 달했지만, 그 후 공동 발의자도 감소세를 보였다. 지난해의 경우 공동 발의자를 42명까지 확보하긴 했지만, 대선 이슈가 겹쳐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정치 전문가들은 법안이 계속 발의되기만 했을 뿐, 제대로 된 전략 없이 동포사회에서 목소리만 높였기 때문에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E-4비자 촉구 운동에 참석한 한 한인 경제인은 “솔직히 워싱턴DC를 공략하지 않은 법안 지지 활동은 전혀 관심을 못 받을 거라고 본다”며 “우리끼리 모여서 E-4비자가 필요하다고 외치고,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지지운동의 대표를 뽑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회의적 시각을 내비쳤다.
지난해 E-4비자 법안에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톰 수오지(민주·뉴욕 3선거구) 연방하원의원은 법사위원회와 세입위원회에서 논의돼야 법안이 통과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결국 해당 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만나고, 위원장이 관할하는 선거구 공략이 동반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제119대 연방하원 법사위원장은 짐 조던(공화·오하이오 4선거구), 세입위원장은 제이슨 스미스(공화·미주리 8선거구)로, 이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법안이 발의돼도 하원에서 논의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기업도 적극 나서야= 당초 E-4비자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포함됐어야 할 내용이었다. 캐나다·멕시코·싱가포르·칠레·호주 등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들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한국 정부는 그간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다. 한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정권에서 FTA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도 제기되는데, 차라리 그 때 협상 과정에서 E-4비자를 끼워넣는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들이 합법적 로비에 나서지 않는 점도 문제다. 정치자금 추적 단체 ‘오픈시크릿츠(OpenSecrets)’에 따르면, 지난해 E-4비자 법안 공개 로비에 나선 단체는 한국무역협회(KITA)와 LG전자, 미국상공회의소 뿐이다. E-4법안 운동에 참여한 한 한인은 “뉴저지의 한 정치인에게 E-4비자 법안에 동참해달라고 여러 번 얘기해도 무시당했는데, 펀딩에 참여하니 바로 그 자리에서 법안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을 보고 허탈했던 기억이 있다”며 “결국 한국 정부의 적극성과 기업들의 자금 뒷받침이 열쇠”라고 밝혔다.
뉴욕지사= 김은별·윤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