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38)
머리만 땅에 닿으면 업어 가도 모르게 잠들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갱년기 증상인지, 밤에도 환한 빛 공해 때문인지, 핸드폰의 블루라이트 때문인지, 요즘 제대로 된 숙면이 너무 힘들다.
밤에는 잠을 자는 것이 건강한 삶일 텐데, 그림책 〈Hildilid’s Night〉의 주인공이신 힐드리드 할머니는 나와는 다른 이유로 잠을 잘 수 없다. 밤을 싫어하는 할머니가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밤을 없애려고 요란스레 고군분투한다. 할머니는 박쥐, 올빼미처럼 밤에 활동하는 동물은 물론 심지어 별, 달빛까지 싫다. 할머니는 밤을 몰아내기만 한다면, 해님이 언제나 할머니의 오두막을 비춰 줄 거라 생각한다.
밤을 싹싹 쓸고, 북북 문지르고, 박박 비비고, 탁탁 털어내도 밤은 그대로다. 자루 안에 쑤셔 넣으려다 실패하고, 큰 가마솥에 불을 지펴 밤을 끓여 김으로 날려보내려, 국자로 퍼내고 휘휘 젓고, 바글바글 끓여도 봤지만 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밤을 친친 감아 꾸러미로 엮어 시장에 내다 팔려고도 하고, 가위로 잘라 늙은 사냥개에게 삼키라고 던져주기도 하지만 그것도 실패한다. 이번에는 살살 달래어 보내려고 할머니는 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우유도 한 사발 준다. 그래도 떠나지 않는 밤에게 주먹질하고, 콱콱 짓밟고, 꾹꾹 파묻으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밤에 화가 난 할머니는 밤에게 퉤-하고 침도 뱉는다.
지쳐버린 할머니가 “더 이상 밤한테 신경쓰지 않을 거야.”하고 밤한테서 등을 돌렸을 때, 언덕 위로 해님이 환하게 솟아오른다. 밤과 싸우느라 너무 피곤한 할머니는 잠이 들었다. 창밖엔 밤이 가고 해님이 찾아왔지만, 할머니가 눈을 뜨면 또다시 밤이 찾아올 것이다.
그림 작가 아놀드 로벨은 밤의 이미지와 할머니의 감정을 펜화로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펜화라 전체적으로 흑백으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노란색으로 아침이 왔음을 알린다. 밤새 밤을 쫓아내려 고생인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그 엉뚱함에 우습다가, 쓸데없는 노력에 안타깝다가, 또다시 밤과 대적할 일에 불쌍하기까지 하다. 할머니는 왜 이렇게 까지 밤을 몰아내려 할까?
‘헥삼 가까이에 있는 높은 언덕에 힐드리드라는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림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할머니는 혼자다. 저 멀리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보이지만, 할머니가 사는 높은 언덕에는 할머니와 늙은 개 한 마리뿐이다. 할머니가 진짜 싫어한 것은 밤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홀로 밤을 보내야 하는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봤다. 단지 밤이 싫어서라면, 차라리 밤을 못 본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드는 방법을 택했어도 됐을 텐데…. 할머니는 밤과 싸운다. 있는 힘을 다해 지칠 대로 지칠 때까지 팽팽하게 싸운다. 할머니의 싸움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낮과 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낮과 밤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이 삶과 죽음이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낮이 가면 밤이 오고, 삶이 다하면 죽음이 오는 것이 당연하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안다. 인류가 문명을 구축하고 철학, 종교, 예술을 하는 것도 모두 죽음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을 알지만 산다. 주어진 대로, 흘러가듯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고군분투하면서 산다. 너무 열심히 사느라, 낮밤을 바꿔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늦은 밤까지 일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노란 아침 해를 받으며 잠든 할머니, 또다시 밤이 찾아올 때쯤 일어나 밤과 싸워야 하는 할머니, 그림책은 이런 할머니를 어리석고, 가엾게 보여주려 하지만, 나에게는 오늘을 당당하게 살아냈고, 또 내일도 씩씩하게 살아낼 삶의 용사처럼 보인다.
아무튼, 밤에는 자야 한다. 낮 동안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하루의 고단을 수면제 삼아 푹 자야 한다. 그래야 할머니가 좋아하는 볕의 달콤함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정말… 낮이든 밤이든 업어 가도 모르는 여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