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창가의 풍경은 어느 때보다 변화가 많다. 봄바람이 살랑인다. 세찬 바람이 나무를 뿌리째 흔든다. 비가 내렸다가, 이내 곱게 햇살이 퍼진다. 올라간 기온에 반팔을 입었다가, 다시 떨어진 기온에 두툼한 스웨터를 걸친다. 잔디 위로 싹이 올라오고, 풀들이 먼저 고개를 내민다. 개미가 지은 소복한 모래집이 보인다. 고양이가 잔디밭을 배회하다 나무 아래서 잠을 자고, 새들은 총총걸음으로 먹이를 찾는다.
아침에 일어나 작업실의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은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이다. 누렇게 마른 잔디에 연둣빛 기운이 드문드문 번지고, 그 중앙에 우뚝 선 나무 두 그루도 슬슬 기지개를 켠다. 어느새 하얀 꽃봉오리가 맺혔다. 며칠 새, 나무는 잔 가지 틈새까지 꽃송이를 피워내며 온통 하얀빛으로 물들였다. 바람이 불면 꽃송이가 눈처럼 흩날린다. 며칠 후, 초록 잎들이 가지를 덮었다.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겨우내 잠자던 잔디가 새 옷을 갈아입을 즈음, 그 틈새로 꽃송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란 민들레. 이름도 정겹고 꽃도 예쁘다. 남편과 나의 애창곡인 ‘민들레 홀씨되어’라는 노래가 떠올라 흥얼거리다 보니, 부풀어 오르는 봄기운에 기분이 들뜬다. 여기저기 토끼풀도 소복하게 올라온다. 네잎클로버가 숨어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다. 잔디는 더디게 자라는데 풀들은 어찌 그리도 빠른지. 봄의 기세만큼이나 거침없다.
3월의 변화를 느긋하게 즐기고 싶지만, 풀들은 그저 감상만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올해 유난히도 많은 풀들이 잔디밭을 점령하듯 자라나기 시작했고, 점점 신경이 쓰인다. 우리 집 잔디밭이 아닌 길가의 어느 풀밭이었다면, 사랑스러운 들꽃의 매력에 빠져 한참을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상만 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이웃들의 잘 정돈 된 잔디와 비교하면 우리 집 잔디가 유독 어수선해 보인다. 이대로 가면 HOA*에서 잔디밭의 풀을 제거하라는 경고장이 언제 날아올지 모른다. 가지런히 올라오는 잔디 사이에서 듬성듬성 자리 잡아가는 풀들을 보고 있자니, 슬슬 스트레스가 되어간다. 틈만 나면 나가 잡초를 뽑는다. 뿌리가 얼마나 단단한지, 손아귀가 얼얼해진다. 열심히 뽑아내도 결국 또 자라날 것을 알면서도 애쓴다.
다음 날이면 창밖 풍경이 달라졌을 거라 기대하며 잔디밭을 바라본다. 밤새 다시 자란 풀들이 태연하게 고개를 내민다. 잡초약을 뿌렸다. 그리고 다음날, 힘없이 고개를 숙인 풀들을 바라보며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다가도, 막상 그 사람이 힘든 일을 겪으면 왠지 모르게 미안해지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애써 뽑아내려 했던 것이 조금은 미안해졌다. 3월의 변덕스러운 날씨만큼이나 내 마음도 변덕을 부린다.
창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화분들을 며칠에 걸쳐 분갈이했다. 그동안 잘 자란 식물들을 큰 화분으로 옮기고, 뿌리가 엉켜 자라던 것들은 조심스럽게 나누어 작은 화분에 심었다. 포도송이처럼 번진 다육이들도 이웃과 나누려 옮겨 심었다. 그렇게 자리를 옮긴 식물들은 처음엔 몸살을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터전에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창가에 줄지어 놓은 화분들을 보며 몇 번이고 자리를 바꿔 균형을 맞췄다. 빛이 더 필요한 녀석은 창가로, 그늘을 좋아하는 녀석은 조금 안쪽으로 놓으며 잘 자라기를 바랐다. 내 뜻대로 자라주면 좋겠지만 어떤 것은 기대보다 무성해지고, 어떤 것은 적응하지 못하고 잎을 떨굴 수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과 관심을 주며 가꾸다 보면 축 쳐진 잎들이 다시 생기를 돋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삶도 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제거하려 애쓰지만,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때로는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잔디밭보다 들꽃과 잡초가 어우러진 들판의 풍경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원하는 것만 갖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햇살만 가득한 세상이라면 그곳은 사막일지도 모른다. 바람도, 비도, 잡초도 어우러질 때 비로소 삶의 풍경은 더 조화롭게 완성된다. 창을 가득 채우는 3월의 초록이 싱그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