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민자들이 나누던 말이 있었다. 중국사람은 이민오면 식당을 열고, 일본사람은 공장을 짓는데 한국사람은 교회를 세운다고 했다. 동양 세 나라 사람들의 철학관인지 인생관인지 꽤 다른 이민생활 적응 방식은 살다 보니 사실이다.
그런데 한인들은 교회만 아니라 태권도장도 열었다. 미국 전역 어느 곳을 다녀도 한인교회와 더불어 태권도장을 본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지역인들에게 한국의 무술을 가르치는 간판을 보면 예전에는 그저 반갑다 하고 지나갔었다. 지금은 아니다. 한번 더 돌아보며 감사한다.
앨라배마로 이사 왔을 적에 J사범이 운영하는 태권도장이 있음을 알았다. 몽고메리 시나 맥스웰 부대에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종종 태권도 시범을 봤던 탓이다. J사범은 민간 외교사절의 총수였고 그의 도장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미국아이들은 태극기가 붙은 하얀 도복을 입고 일사불란하게 그의 지시에 날렵하게 따르면서 한국의 무술을 과시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를 따라온 한 협력업체에서 언어와 문화차이로 노사 갈등이 심했을 적에 회사측에서 워싱턴DC에서 명성이 높던 미국 태권도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가진 이준구 대사범을 초빙해 왔었다. 그는 지역 고용인들과 대화의 광장을 열어서 소통을 이루어 냈다. 나도 그 자리에 참석해서 작은 거인이 짊어진 태권도의 위력을 체험하고 놀랐었다.
발레와 체조를 배웠던 딸이 사춘기에 태권도를 배운다고 J사범의 도장에 한동안 다녔다. 그때 현역으로 복무하던 나는 너무 바빠서 딸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는지 태권도장에 따라가 딸이 배우는 것을 직접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3년전 어린 손주가 외가에 왔을 적에 아이를 데리고 J사범의 태권도장을 찾아갔었다.
그는 은퇴했고 젊은 사범이 맡아서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때 4살이었던 아이가 처음으로 태권도의 맛을 봤었고 낯선 언어를 만났다. 집에서 한국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외가에 와도 내가 한글을 안 가르친 탓이었다. 손주는 차렸, 경례 등 한국어 몇 마디를 배운 후 자신이 아는 한국어 단어가 늘어난다고 손가락으로 꼽으며 좋아했었다. 젊은 사범은 재미나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나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아이의 교습과정을 지켜보며 속으로 작은딸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두 여름방학을 몽고메리에서 태권도 교습을 받았던 손주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로 이사했을 적에 자연스럽게 가까이 있는 태권도장을 찾았다. 더우기 도장에서 학교가 끝나면 아이를 픽업해서 돌 봐주고 태권도 교습을 해주어서 딸과 사위에게는 큰 도움이다. 딸네부부는 아이가 안전한 환경에서 엄격한 규율을 따르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아이가 도장에서 배운 좋은 예법은 내가 성장하며 배운 충효예를 상기시켰다.
나는 딸네에 들리면 태권도장에 가서 손주의 교습 정경을 지켜보며 한인부부의 열성적인 노고에 감사한다. 아이가 태권도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은 신체단련과 인성교육의 기반이다. 손주는 인내심과 할 수 있다는 의지력을 키우며 동시에 한국의 얼을 조금씩 알아간다. 태권도 훈련중에 사용하는 단어도 한국어다. 차렸, 경례, 준비, 시작, 그만, 다시, 계속, 감점, 기합 등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언어로 수업을 받고 어른들에게 큰 절 인사도 배우니 내 가슴이 뿌듯했다.
손주를 훈련시키는 그랜드 마스터 도한진 관장의 가족은 모두 블랙벨트 고단자 태권도인들이다. 대학생들인 딸과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가르치고 부인은 도장을 운영한다. 크게 들어내서 떠들썩하지 않고 조용히 지역사회의 일부로 살면서 모국의 정신과 혼을 주변에 퍼트리는 도관장의 가족을 보면서 마음이 따스했다. 겸손하고 사랑과 열성으로 아이들을 지도하는 이 가족의 삶은 ‘people to people’의 완벽한 본보기이다.
목련과 개나리꽃들이 화사한 지난 주말, 태권도장에서 토너먼트가 있었다. 근 35명 크고 작은 아이들이 정중히 국기에 경례하고 사범의 지시에 따르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아이들은 한국이 지구 어느 귀퉁이에 있는 나라인지 알까? 궁금했다. 하지만 한국어 지시를 잘 따르는 것이나 데모 팀이 음악에 맞추어 기본 자세에 창조적인 우아한 멋을 보탠 묘기는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태권도의 경지라 놀라웠다.
태권도장 입구에 환하게 얼굴을 들어낸 진분홍 목련이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도관장과 야무지게 뒷바라지를 하는 부인의 맑은 인상을 닮았다. 모국이 어수선해도 이 가족처럼 세계 곳곳에서 ‘Fitness with meaning’을 실천하며 대한민국을 지키는 사람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