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를 깨우려고 뉴올리언스 시티 파크를 찾았다. 400살이 넘은 참나무들과 나무마다 수염처럼 늘어진 스패니시 모스는 언제 봐도 이국적이다. 참나무들은 마치 재즈바에서 느릿하게 대화를 나누는 나이든 친구들 같다.
자연스레 발걸음은 조각 공원으로 향했다. 현대 조형물들이 숲, 꽃, 개울, 호수와 어우러져 생동감 있는 곳이다. 참나무 숲이 노년 같다면 조각 공원은 청장년이다. 호수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나뉜 조각 공원, 호수 가운데에서 물이 옹달샘 마냥 뿜어져 나온다. 물은 호수를 채우고 어디론가 흐르고 있을 터이다. 흐르는 물은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개울로 이어진다. 개울 한쪽에선 두 척의 카약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1월 한파 때문에 열대식물인 야자수와 봄꽃인 아가판서스가 누렇게 시들었다. 안쓰러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물은 냉기에도 불구하고 초록 잎을 지켜내거나 새싹을 밀어내고 있었다. 어린 싹들이 기특하여 가까이서 살펴보았다. 나무들마다 쌀알만한 겨울눈이 한가득이었다. 문득 얼마전에 읽은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이 떠올랐다. 주인공 토리가 삶이 고되어도 때로는 순리대로 때로는 힘겹게 살아내는 모습이 겨울눈과 닮았다.
이 소설은 과수원 집 딸, 토리가 사랑을 하면서 소심한 소녀에서 대담한 여성으로 변모하는 이야기이다. 열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른 선택지가 없는 토리는 가사를 도맡는다. 토리에게 통 관심이 없는 아빠, 삐딱한 남동생, 상이 군인 이모부의 뒤치다꺼리와 복숭아 수확, 판매는 토리가 할 일이다. 그러다 토리가 열일곱 살이던 1948년, 길을 묻는 낯선 청년 윌과 사랑에 빠진다. 여성으로 사는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모르고 살던 토리는 “폭풍처럼 다가온 사랑에 휩쓸려” 버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토리가 나눈 사랑이 순탄치 않다. 윌은 아메리칸 원주민이고 그 당시에는 아메리칸 원주민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아주 심했기 때문이다. 토리 가족과 동네 사람들 모두 윌을 배척한다. 아! 이웃집 루비앨리스 아주머니는 윌에게 먹을 것과 이불을 준다. 루비앨리스도 동네에서 특이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윌에게 현상금까지 건다. 윌은 사람들에게 쫓기면서도 토리를 떠나지 않는다. 윌은 어디를 가든 피부색만으로 괴롭히는 사람들은 차고 넘칠 거라며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렇지만 결국 윌은 토리 뱃속에 아기를 남겨둔 채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열일곱 살 토리가 마흔 살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련을 겪으며 자기 삶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과정이 애틋하면서도 강인하다. 토리의 다음 선택이 궁금하여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토리는 “온갖 걸림돌과 댐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고 흐르는 이 강물,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 그저 그동안 쌓아온 걸 가지고 계속 흘러가는 이 강물이 내 삶과 같았다”고 고백한다. 거센 물살 속에서도 강은 굽이치며 길을 찾아간다. 토리의 삶도 강물처럼 흐른다. 때론 막히고 때론 돌아가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은 2023년에 발간되었고 셸리 리드가 50대에 쓴 데뷔작이다. 셸리 리드는 콜로라도 주민으로, 콜로라도 자연을 소설 속 배경으로 묘사한다. 작가가 “어린 시절의 풍경은 우리를 창조한다”, “나라는 존재를 형성한 건 내 고향이었다”라고 쓴 것은 고향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작가의 삶을 함축하여 보여준다.
언젠가 콜로라도 덴버 주변을 여행했었다. 만년설을 인 로키산맥, 산을 품은 호수들, 끝없는 들판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작가는 주변환경에서 얻은 지혜를 토리의 삶 속에 담아낸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고.
공원에서 추위를 이겨낸 연분홍 철쭉을 보고 있자니 분홍꽃이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나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책에 몰입한 탓이리라. 토리네 복숭아나무는 조지아에서 가져왔단다. 조지아는 ‘피치 스테이트’라 불리는 복숭아로 유명한 곳. 토리의 복숭아나무는 마치 윌이나 나 같은 이주민이 정착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상징 같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우리네 삶엔 이유가 있고, 만나야 할 풍경이 있으며, 견뎌야 할 계절이 있다. 삶이 흔들려도 흐름을 잃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