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유예 발표 전 공화 의원·외국 지도자들과 통화”
베선트 미 재무 “처음부터 대통령의 전략”
‘월가 황제’ 다이먼 발언 영향 분석도
전 세계 교역상대국에 관세 폭탄을 안기고도 꿈쩍 않던 트럼프 대통령이 9일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국가별 상호관세를 90일간 유예한다고 전격 발표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람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금융시장의 위험 신호와 월가의 반발, 정치권의 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8일 저녁부터 9일 오후까지 18시간 동안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무역 참모들이 여러 공화당 의원, 외국 지도자들과 대화하면서 정책 변경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 의원들과 외국 지도자들은 흔들리는 세계 시장 등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달 2일 전 세계를 상대로 상호관세를 발표하면서 무역전쟁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으로, 재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취임 전부터 내세워온 대표적인 정책에서 갑자기 ‘유턴’한 것은 불공정한 세계 무역 체제에서 미국인들을 해방시키겠다던 트럼프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금융시장이나 정치권, 지지자들의 반발을 여전히 무시하지 못한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자산 운용사 SLC의 덱 멀라키 대표는 “이번 관세 유예 조치는 그가 시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자신이 과도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장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고,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안전성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요일인 지난 6일까지 미국 주식 시장에서 급락장이 두 번이나 나타났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주말에 플로리다에서 골프를 치며 보냈고, 무역상대국들이 협상하려면 높은 기준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 혼란은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6일 SNS에 올린 영상. 트럼프 대통령 트루스소셜 계정
하지만 7일 정치권의 비판 목소리가 커지면서 긴장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물론 트럼프 대통령을 전폭 지지하던 공화당 의원들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최측근 일론 머스크를 비롯한 억만장자 후원자들도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 정책에 반발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한국 등과 협상을 시작했으며, 월가에서 대통령의 측근 중 가장 신뢰하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을 무역 협상 책임자로 지명했다는 게 FT의 분석이다.
백악관은 8일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협상팀에 상호관세 등과 관련해 국가별로 맞춤형 협상을 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강경파 ‘관세 책사’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의 영향력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유예를 검토하면서 베선트 장관이나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과 논의했다고 밝혔고 나바로 고문은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8일 밤부터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정치권 등과 대화한 것이 방향 전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는 게 WP의 분석이다.
공화당 내 대표적 친트럼프 인사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등 공화당 상원의원 몇 명은 이날 폭스 뉴스에 출연해 관세 문제에 대해 언급했고 이들 의원 중 일부는 방송 후 트럼프 대통령과 한 시간가량 통화했다.
이 중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두 가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국가들이 관세를 내리도록 관세를 협상 도구로 활용할 수도 있고, 관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러면서 후자의 경우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미국과 자신의 지역구인 텍사스주에 매우 해로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9일 오전 카린 켈러 주터 스위스 대통령과도 25분간 통화했다. 스위스의 대표 수출품인 롤렉스 시계와 초콜릿에는 31%의 관세가 적용된다.
켈러 주터 대통령은 스위스 기업들이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으며, 스위스가 작년에 미국산 산업재 수입에 대한 관세를 폐지했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유럽연합(EU) 무역·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은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에게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EU는 이날 미국산 철강 및 알루미늄 관세에 대한 대응 조치를 승인했는데, 이는 콩 농가부터 플라스틱 제조업체에 이르기까지 트럼프의 지지층에 타격을 준다.
9일 백악관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 선수 행사에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관세 전면 유예로 방향은 튼 데에는 미국 국채 시장의 급락세도 크게 작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채 시장의 반응 때문에 상호관세를 유예했냐는 질문에 “난 국채 시장을 보고 있었다. 국채 시장은 매우 까다롭다”면서 “내가 어젯밤에 보니까 사람들이 좀 불안해하더라”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으로, 부채를 활용해 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미국 채권 시장의 경고 신호를 누구보다 잘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과 가까운 한 인사는 “트럼프 대통령은 월가가 타격을 입는 것은 괜찮지만 집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월가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의 인터뷰 발언이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다이먼 CEO는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경기 침체로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나는 차분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진전을 이루지 못하면 상황이 더 악화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등 경제학자들도 금융 위기를 경고하고 나섰다.
트럼프 행정부 당국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방향 전환을 처음부터 계획된 ‘큰 그림’의 일부로 설명하고 있다.
베선트 장관은 9일 지난 한 주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처음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strategy all along)으로 표현하면서 75개국 이상의 국가들을 협상에 불러들였다고 말했다.
상호관세가 일단 유예됐지만 관세와 관련한 불확실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대부분 국가에 대한 10% 기본관세가 유지되고 있으며, 세계 2위 경제 대국인 중국과의 무역전쟁은 격화되는 상황이다.
워싱턴의 로비단체 전미무역위원회(NFTC)의 제이크 콜빈 회장은 “이번 관세 유예가 당장의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기업들의 무역, 조달, 투자와 관련해 계산을 마비시키는 불확실성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