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시가 수면주사를 맞았다고 그녀가 말했다
gracious retirement living
주방이 없는 아파트는 그럭저럭 눌러 사는 거실이 마디마다 서걱거리고
소파 모서리 옆 문만 열면 만나는 침실이 가까운 이웃처럼 멀다
아는 늙은이도 없고 모르는 젊은이도 없어서 호칭이 적당히 헷갈리는
구멍 같은 공간 앞 자리에서 불쑥 밥 먹는 앰뷸런스가 낯설지 않다
앞뜰 풀밭에 거위 한 마리가 외짝이다
4층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출입문을 나서면
아파트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어정쩡한 뒷길을 걷는다
앞길 이름에 얹혀 사는 어둑한 거리는
먹다 버린 식욕들이 계절 지난 감기처럼 오슬오슬하다
차선이 없는 하루의 산책은 스톱사인의 치다꺼리가 아니고
큰길의 신호등은 세 가지 색깔로 나라를 다스린다
그 중 하나가 노랑이고 가도 되고 서도 되지만
가라는 것도 아니고 서라는 것도 아니다
목줄을 맨 푸들 한 마리가 길섶에서 낡은 풍경처럼 오줌을 싼다
길 옆 작은 상가는 오픈사인이 부지런한 그루밍 가게 옆으로
오래된 상호가 말쑥한 시계방 간판이 뒤뚱뒤뚱 굴러간다
it’s about time
분침과 시침이 겹칠 때면 숫자판에서 밀려난 털들이 무성하고
창문 너머 입맛과 식욕이 널뛰는 식당은 시간가는 줄 모른다
포크와 나이프가 숫가락과 젓가락을 넘보고
주걱과 주걱 아닌 것 사이에서 이제 막 볕든 아이들이
잘근잘근 나이를 먹는 게 보인다
빈 가게 출입문 유리창엔 색 바랜 쪽지가 또 하루를 보탠다
Permantly closed
아파트가 아파트를 지나 구름이 흐르는 개울에서 목을 축이고
뭍으로 나온 거북이가 차 바퀴 자국을 아슬아슬하게 건너며
몇 곱절 생애를 거스르며 십장생(十長生)에 입문하는 뒷길은
뒷길의 일일 뿐 자세히 본다고 앞길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잠든 그레이시를 깨울 일이 없었다고
그녀가 오늘 말하지 않았다
이 골목엔 태엽처럼 감겼다가 한꺼번에 풀려난 저녁이 깊숙하다
▶ 시인약력
1944년생. 서울고, 연세대 졸업. 1997년 ‘시문학’으로 등단. 애틀랜타 한돌문학회, 애틀랜타 한국문인회 회장을 역임. 시집 ‘Twin Lakes’(2018년), ‘삭제된 메시지입니다’(2023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