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은 남자들에게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오죽했으면 어느 작가는 정년퇴직을 ‘생전 장례식’이라고 했을까. 나도 정년퇴직 후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던 암울한 시기가 있었다. 한평생 직장을 삶의 전부로 알고 살아온 나에게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절망이요 고통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몰두하고 싶었다. 직장과 무덤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인생이란 얼마나 따분한 일인가. 나에게는 일이란 중심이 꼭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치에서 빠져나오듯 ‘나로부터 해방되는 전기를 맞이했다. 운명적인 한 권의 책을 만난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쓴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이었다.
“참다운 삶을 바라는 사람은 주저 말고 나서라. 싫으면 그뿐이지만, 그럼 묘자리나 보러 다니든가.” 오든의 시로 시작하는 이 책은 서두부터 사뭇 도전적이었다. 저자는이 책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일이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가를 갈파하고 있다. 즉, 내적 동기부여든 외적 동기부여든 삶의 목표를 가지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훨씬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지금 자기가 하는 일에 몰입하라’고 말한다. 아무리 하잘것없는 일이라도 그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만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세상은 흥미진진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상상력이 모자라거나 게으르기 때문에 그걸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저자는 삶을 사랑하라는 감미로운 교시를 내리지 않는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공허한 구호를 되뇌지도 않는다. 그 대신, 지금 자기가 하는 일에 몰입하라고 다그친다. 현실 어디에 눈을 주더라도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행위를 촉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대상이 널려있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넋두리는 용납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그것은 내 만족의 원천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일을 이루어낸다는 의식이나 의욕이 없다면 인생은 무료하고 허망할 것 같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 가치 있다고 느낄만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송세월하는 인생을 나는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반 우드워드 말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가끔 노인센터에 다니며 잡담을 하거나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인 평범한 노인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장기 상대자가 없어 멍하니 앉아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나가면서 말했다. “할아버지, 그냥 그렇게 앉아 계시느니 그림이나 그리시지요.” “내가 그림을? 나는 붓을 잡을 줄도 모르는데…” “그야 배우면 되지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나는 이미 일흔이 넘었는 걸” “제가 보기엔 할아버지 연세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더 큰 문제 같네요.“ 젊은이의 핀잔은 곧 그 할아버지로 하여금 미술실을 찾게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않았다. 더우기 그 연세가 가지는 풍부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성숙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은 떨렸지만, 그는 매일 거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이 새로운 일은 그의 마지막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가 바로 평론가들이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했던 해리 리버맨이다. 그는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의 격려 속에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그림을 남겼으며, 백한 살, 스물 두번 째의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삶을 마쳤다.
이 일화는 큰 충격이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고, 거기에 나의 정신을 걸었다. 누구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싶거나 스스로 무너질 때 차오르는 비애를 기도하듯 쓰다 보면 바람은 잔잔하여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바늘구멍만한 희망도 안보여 절망하고 낙담할 때 글쓰기는 나의 위로요 삶의 의미였다.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무언가 가슴 속에서 북바쳐 오르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글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글쓰기는 나의 깃발이었다. 내 존재를 알릴 수 있는 훌륭한 표적처럼 글은 깃발이 되었다.
나는 그것에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의 바탕도, 그것의 빛깔도, 그 생김새도 돌아볼 여유가 없이 다만 깃발은 휘날리는 사명만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것에 도취했다. 이처럼 글쓰기라는 나의 꽃은 암울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로 다가왔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고통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고, 거기에 나의 정신을 걸었다. 바늘 구멍만한 희망도 안 보여 절망하고 낙담할 때, 글쓰기는 나의 위로요 삶의 의미였다.
초년의 운도, 중년의 성공도 최후의 승리는 아니다. 인생의 마지막 챕터에 들어서면 새로운 판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부심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글쓰기의 힘을 매일 경험하고 있다. 글을 쓰면 우선 생각이 정리된다. 창조의 기쁨이 있다. 글쓰는 사람에게 정년퇴직은 없다. 나는 권하고 싶다. 마음 속으로 힘든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마음을 모아 글을 써보시라. 속는 셈 치고 한번 써보시라. 글쓰기의 힘은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