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신부님이 편지를 보내셨다. 가끔 신문이나 잡지에 한국에 관한 재미난 기사가 나면 그것을 오려서 보내주신 터라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봉투를 열고 속을 꺼내서 폈다가 깜짝 놀랐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내가 정확히 22년 전에 신부님께 보낸 연말 편지였다. 그동안 여러 곳으로 이동을 하셨던 신부님이 이제껏 보관하고 계신 것이 놀라웠다. 편지에는 아일랜드 서부, 15세기에 건축된 크나포그 성(Knappogue castle)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 가족 4사람의 사진이 크게 프린트 되어있다. 찬찬히 다시 보니 남편과 내 머리는 검고 숱도 많다. 주름살도 안보인다. 옆에선 딸들은 한창 청춘, 싱싱하고 젊다. 이 사진은 남편이 크게 확대해서 컴퓨터 테이블 옆에 붙여놓고 늘 눈길주는 사진이다.
오래전 초록의 섬 아일랜드를 사랑하게 되면서 아일랜드 출신 작가들과 친해졌고 그들의 스토리를 통해서 나는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화, 생활 풍습을 소개받았다. 수백 년 영국의 권력아래 고난과 시련을 버틴 저력은 어떤 상황이든 유머 스럽게 마주하던 사람들의 자세였다. 그것이 좋아서 꼭 아일랜드를 방문하고 싶었다.
군에서 전역한 뒤 지역 상공회에서 풀타임으로 일할 적이다. 나는 남부에서 잠시 영광의 탈출을 꿈꾸며 혼자 아일랜드 여행계획을 세우고 가족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남편이 함께 가겠다고 나섰고, 이어서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던 큰딸이 손들자 대학생이던 작은딸이 두 손을 들었다. “그래 가족여행하자.” 하고 각자에게 임무를 맡겼다. 남편은 운전사, 큰딸은 여행안내자, 작은딸은 재정담당, 그리고 나는 총책임자라 정했다. 큰딸은 빠르게 모두에게 아일랜드에서 꼭 보고 싶은 곳들을 알려달라고 해서 열흘 여행일정과 숙소까지 깔끔하게 준비했다.
미국에서 출발한 가족들은 영국으로 가서 큰딸을 만나 함께 아일랜드로 갔다. 우리는 서부 섀년 공항에 도착해서 차를 렌트 했다. 왼쪽 운전을 처음 하던 남편은 좁은 길에 좌충우돌하며 헤매다가 타이어의 hubcab들을 날려보냈다. 우리는 “천천히, 천천히”를 외치며 며칠 불안했다가 결국 영국에서 왼쪽 운전을 하던 큰딸이 운전대를 잡았다. 매일 맛있는 저녁과 함께 기네스 맥주를 마시고 행복했던 남편이 잠들면 여자 셋이서 다음날의 일정을 재조정해서 관광버스가 다니지 않는 시골 곳곳에 숨어있던 볼거리까지 골고루 찾아다녔다. 그리고 지갑을 가졌던 작은딸이 가게에서 물건을 보거나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적에 하루 비용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준 따가운 눈총을 견뎌냈다.
특히 아일랜드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잔잔하게 풀어내던 여류작가 메이브 빈치(Maeve Binchy)가 여름휴가를 보내는 바닷가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책장에 진열된 그녀의 책을 밤새 읽었다. 가슴에 아픔과 동시에 따스함을 준 주인공들이 실제인양 착각 되어서 막상 아일랜드 작은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정한 이웃같이 정겨웠었다. 그렇게 천연의 아름다운 지역들만 아니라 성을 포함한 다양한 숙소에서 색다른 체험을 하며 오감을 충족시킨 행복했던 날들로 아일랜드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는 성의 뜰에서 찍은 가족사진 옆에 아일랜드 들판에서 잡아서 책갈피에 끼워온 샴록(shamrock)을 큰 테이프로 붙이고 아일랜드의 축복을 보탠 연말편지를 써서 함께 넣어 보냈다. 나의 연말편지를 받는 지인들이 새해는 아일랜드의 축복으로 더 많은 행운을 받길 빌었다. 그리고 아일랜드에 도착한 첫날, 한 고성의 뜰에서 찾았던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의 증표로 우리 부부의 사진이 든 액자속에 간직하고 있다.
신부님은 편지에 쪽지를 끼워 넣으셨다. 예전에 어렸던 딸들이 사회인이 되고 부모가 된 것에 신부님은 놀라운 세월의 흐름을 보셨다. 나의 연말 편지를 손주들에게 보여주고 아일랜드 이야기를 해주라고 하셨다. 찰스 신부님은 80대 중반이시지만 정정하시다. 당신이 필요한 곳에 맘대로 운전해서 다니시고 가끔 몽고메리 여러 성당 신부님의 스케줄이 바쁘면 당신이 방문해서 미사를 집전해 주신다. 오래전 내가 카톨릭이 되고 싶다고 부탁드렸을 적에 신부님이 직접 필요한 예식을 맡아서 해 주셨던 인연으로 그는 나에게 특별한 분이시다. 나의 든든한 빽이다.
암튼 신부님이 봄청소를 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소장품을 정리하시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분의 사랑과 기도로 우리 가족이 늘 축복을 받음을 깊이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