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을 맞이했다. 새싹들이 돋아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잎사귀가 무성하게 자라났다. 초록의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유난히도 청명하게 보였다. 무겁게 시작했던 2025년도 어느덧 ‘가정의 달’ 5월로 빠르게 향하고 있다. ‘가정’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평화롭고 온화한 느낌이라 때때로 부푼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가족이란 가장 가까이서 오래동안 함께 살아왔음에도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자주 느낀다.
작년 5월, 큰 아이의 대학 졸업식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독립적인 성인으로 성장한 아이를 바라보며 감사함과 대견함을 뒤로한 채, 깨끗한 새 호텔에서 기분 좋게 눈을 떴다. 뽀송한 침구, 환한 아침 햇살까지 완벽했다. 게다가 그 날은 마더스 데이였다. 무슨 즐거운 일이 펼쳐질까 은근 기대하며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미소도 잠시, 아주 단순한 일이 발단이 되었다. 간이 주방 싱크에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반복되는 소리에 민감한 나는 흘려버리는 물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왜 물이 계속 틀어져있어?” “나 면도하고 있잖아.” 심통맞은 대꾸였다. 나는 그저 물소리가 신경 쓰여 물었을 뿐인데, 돌아온 싸늘한 말에 상쾌했던 마음이 달아났다. 이번엔 애써 잊어버리고자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화장실에 따라 들어온 남편이 한마디 덧붙였다. “왜 물을 계속 틀어놔? 아까 내 상황이랑 똑같잖아.” 아침부터 비아냥대는 말투가 속상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아울렛에 갔을 때, 남편과 막내 아들이 마더스 데이 선물을 고민하더니 결국 고르지도 못하고 말았다. 바로 내 앞에서 살까 말까 망설이며 장난기 있는 웃는 모습을 보니 괜히 약이 올랐다. 기분을 추스리려고 호텔방에서 나와 혼자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쓸쓸했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방으로 올라가 짐을 정리하고, 조식을 먹기위해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로비에는 마더스 데이를 축하하며 여행중인 미국인 가족들이 가득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한 웃음을 짓고 마치 팀 대항 경기를 하듯 열띤 대화를 뽐내고 있었다.
“뭐야? 뭔데 또 그래?” 갑자기 적막을 깨는 남편의 목소리에 참았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아니, 아까 말을 왜 그렇게 해?” 나는 상황 설명을 하며 서운했던 마음을 꺼내 놓았다. “아, 그래? 그래서 기분이 안좋았던거야? 마음 풀어. 그런 뜻이 아니었어.” 라는 정답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뭐 그거 때문에 이런다고? 아니 면도하면서 물 좀 틀어놓은게 어때서 그것 가지고 뭐라는거야?” 그리고는 자기가 언제 화를 냈냐며 또 화를 냈다. 나도 서운함을 쏟아내며 쏘아붙이고 말았다. 웃음 소리와 즐거운 대화가 가득할거라 기대했던 귀갓길 차 안의 공기는 싸늘했고 나는 줄곧 굳은 표정으로 창 밖만 바라보며 침묵했다. 아침에 기대했던 아름다운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고, 가족 모두의 하루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만나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켜며 하루를 씼어냈다. “그냥 우리끼리 위로하고 축하하자!” 서로 수고했다 토닥이고 마음을 달랬다. 계산을 하고 일어나려는데, 귀여운 서버가 등 뒤에서 밝게 소리쳤다. “해피 마더스 데이!” 우린 마주보며 깔깔대고 크게 웃었다. 그 날 처음들은 그 흔한 축하 메시지, ‘해피 마더스 데이’라서…… 공허한 마음에 눈물이 찔끔났다.
부엌 아일랜드 위에는 나를 기다리며 남편의 꽃다발과 아이들의 카드가 고이 놓여져 있었다. 먼저 내밀어준 화해의 손길에 하루종일 심통 부리며 기대에 못미친 가족을 탓했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특별한 날이라 더 기대감을 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가족이라해도 서로의 마음을 꼼꼼히 챙기며 공감해주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바라기 보다는 내가 나를 먼저 토닥이며 내게 필요한 위로와 기쁨을 먼저 만들어 나가야겠다. 감정을 다스리는 주체는 바로 ‘나’라는 것을 배웠다. 어른이 된다는 건 스스로를 돌아보며 배우고, 조금씩 성숙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