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07년에서 979년의 시기, 그러니까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서기까지의 이 기간은 중국 역사에서 5대10국시대로 불린다.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화북을 통치한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개 단명왕조와 화남 등지의 10개 지방정권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였다. 한 마디로 난세 중의 난세였다.
정권욕에 눈이 먼 폭군과 간신들이 날뛰던 5대10국 시대는 5,000년 중국 역사에서 ‘패륜의 시대’로 꼽힌다. 정권유지와 정권탈취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불의한 세상이었다. 이 ‘패륜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후진의 고조 석경당이다.
그는 본래 후당의 절도사였다. 후당의 명종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민제에게는 두 명의 두려운 경쟁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봉상 절도사 이종가이고 또 한 사람은 명종의 사위인 하동 절도사 석경당이었다. 민제는 두 사람을 변방의 절도사로 보내 그들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종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민제는 대군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섰는데 봉상애 이르자 그들은 이종가에게 투항했다.
934년 이종가는 민제를 죽이고 자신이 제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후당의 마지막 황제 폐제이다. 폐제 이종가는 부장 장경달에게 석경당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수만의 군사를 거느린 장경달은 진양 근교에서 석경당군과 대치했다. 장경달군의 사기왕성한 모습을 본 석경당은 겁을 먹고 북쪽 거란에 원병을 요청했다.
“신 석경당은 거란 국왕에게 글을 올립니다. 이종가라는 자가 황제를 폐하고 제위에 오르는 황포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신은 이종가의 죄를 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애석하게도 수하에 거느린 군사가 적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에 귀왕을 아버지로 받들고 자식의 예를 다할까 합니다. 부디 군사를 남쪽으로 보내 반역의 무리를 소탕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종가를 토벌하는 날, 신은 거용(허베이성 일대)과 안문(산시성 대현 일대) 이북의 땅을 귀왕에게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할까 합니다.”
이 글을 본 석경당의 부장 유지원은 굴욕적인 원병 요청이라 하여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45세가 되는 석경당이 34세의 애숭이 거란왕 야율덕광을 ‘아버지로 받든다’는 말이 웬 말이며, 신이라고 일컫는 것도 생각할 문제인데 하물며 ‘자식의 예를 다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이다. 유지원은 부아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유지원은 원병 요청을 재고할 것을 석경당에게 다시 간언했다. 그러나 오로지 원병만을 생각하는 석경당에게 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며칠 후 석경당의 친서를 휴대한 사자가 도착했다. 석경당의 원병 요청을 받고 거란왕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질 정도로 기뻐했다. 거란왕은 석경당의 사자에게 이같이 약속했다. “대추가 익고 말이 살찌는 이 가을에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구원에 나설 것이오.”
과연 가을이 되자 거란의 야율덕광은 약속대로 5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왔다. 당시 석경당은 이종가와의 싸움에서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는데, 야율덕광의 거란군이 이종가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단숨에 전세를 뒤바꿔버렸다. 게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종가 휘하의 장군들과 병사들도 모두 황제를 배신하고 석경당에게 항복했다. 결국 패배한 이종가는 가족들과 함께 누각에 불을 질러 스스로 분신자살했다
후당을 멸망시킨 석경당은 즉위식을 거행하여 후진의 황제로 즉위한다. 거란의 야율덕광은 석경당을 중원의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며 신하들과 함께 그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손수 책봉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야율덕광은 직접 석경당에게 옷을 입혀주었는데, 당연히 거란식 의복이었다.
거란의 도움으로 후진의 황제가 된 석경당은 거란왕에게 축배를 올려 장수를 빌고 그 앞에 엎드려 맹세했다. “불초자식 석경당은 삼가 부군 거란왕에게 효행의 정을 표시하는 뜻에서 연운 16주를 바치겠습니다. 그 밖에 매년 비단 30만필씩을 바칠 것을 약속드립니다.”연운16주는 지금의 베이징 부근을 중심으로 한 16개주를 말하며 요동의 핵심 지역이다. 북방민족의 전통적인 남진 루트인 요서회랑의 코밑에 해당된다.
거란군의 출병으로 후당이 멸망하고 새로 들어선 왕조가 석경당의 후진이다. 제위 찬탈로 석경당은 아주 거창한 역사적(?) 타이틀을 얻는다. ‘아들 황제’라는 만세의 조롱에, 천년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한간(매국노)’이란 딱지다. 전략요충지인 연운16주를 내줌으로써 이후 400여 년 동안 거란에 이어, 여진, 몽고 등 북방민족 침략에 한족은 어육(魚肉)의 참화에 시달리게 된다.
아주 집요하다. 아니, 뭔가에 씌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라고 했나. 북한, 김정은을 향한 문 대통령의 지극정성 말이다. 김정은 대변인으로 불린지 이미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음마다 외치느니 김정은과의 대화이고 무조건적인 평화, 또 평화다. 8.15 경축사 주제도 한반도평화프로세스였다.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는 종전선언을 촉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서도 평화구상을 밝히면서 교황의 방북을 당부했다. 유럽 3개국 순방외교에서도,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도 문 대통령이 꺼내 든 화두는 북한이었다.
이와 동시에 문 정권이 비밀프로젝트로 추진해온 것은 남북정상회담이다. 그 첫 시도는 올해 남북 유엔 동시가입 30주년을 맞아 남북정상이 유엔총회에 동시에 입장하는 것이었다. 잘하면 세계적 볼거리가 될 뻔했던 그 물밑 작업은 김정은의 불참으로 그만 무산됐다.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어게인 2018 평창 이벤트’다.
2022년 2월에 열리는 베이징 동계올림픽 세리모니에 남북정상이 모두 참석하는 거다. 그리고 올림픽을 배경으로 시진핑 블레싱하에 문재인과 김정은이 만난다. 거기에다 하나 더. 바이든이 참석할 경우 4개국 정상회담을 배경으로 화려한 종전선언 평화 쇼를 펼치는 거다. 하지만 이 꿈도 바이든의 외교적 보이콧으로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림노래 같은 그의 종전선언타령이 이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최근 제20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전체회의에 보낸 영상 개회사에서“종전선언은 항구적 평화의 입구이자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을 이끄는 마중물” “종전선언은 전쟁의 기억과 이산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해와 협력, 관용과 포용의 가치를 공유하며 한반도 평화 시계를 다시 움직이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관련국 중 아무도 진정한 관심이 없고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종전선언의 실현을 위한 문 정권 의 끈질긴 집념은 ‘한반도 평화협정’을 향한 북한의 반세기에 걸친 집념을 연상시킨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1974년 ‘미·북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한 이래 토씨 하나 변하지 않은 평화협정 타령을 무려 48년째 계속 중이다.
한반도 종전선언은 누구든 유혹할 달콤한 희망이다. 잠재적 위험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선언이 북한 핵무기 폐기를 담보할 수만 있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핵 폐기 약속 없는 김정은과 왜 종전선언을 해야 하나? 국가 안보를 볼모로 하는 문 정권의 위험한 도박은 결국 실패로 끝나겠지만, 대체 무슨 의도로 그토록 집요하게 종전선언을 추진한 것인지 훗날 반드시 진실 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