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 ‘맞는 역할’ 단골 배우_월남선 헬기 기관총 사수 활약
시카고 GE서 36년 일하고 은퇴_“애틀랜타선 봉사로 보람 찾아”
지난주 조 회장을 만나 참전전우회 이야기를 비롯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들었다. 월남전 참전 경험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었다. 미국 대기업에서 36년을 일한 경험도 특별했다.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부분을 남긴다는 마음으로 조 회장과의 만남을 거칠게나마 정리해 본다.
베트남엔 언제 어떻게 가셨습니까?
“1969년 3월에 가서 20개월 있었습니다. 백마부대 일등병이었죠. 잠자리비행기라 불렀던 헬기의 기관총 사수를 했습니다.”
조지아에도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이 많을 텐데 한인은 얼마나 되나요?
“드러나지 않는 분들도 많아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안 됩니다. 우리 동남부 유공자회에는 130명 정도 활동하고 있어요. 미국 전체로는 3000명 쯤 된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총 32만 여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평균 주둔군은 5만명 정도. 그들을 통해 한국은 외화 획득과 경제 개발이라는 소위 월남전 특수를 누렸다.
대가도 컸다. 5099명이 전사했고 1만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훗날 고엽제 피해자로 신고한 사람도 16만 명에 이른다. 조 회장은 나라의 부름에 목숨 걸었던 사람들을 국가가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공자회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행사는 어떤 겁니까?
“2018년에 조지아 주지사가 매년 3월 23일을 ‘한국군 월남전 참전 전우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미국 50개주 중 메릴랜드주에 이어 두 번째였습니다. 이듬해 기념식을 했는데 작년엔 코로나로 못했습니다. 올해도 미뤄 오다가 오는 9월11일에 3주년 기념식을 하게 됐습니다.”
행사는 이날 오후 5시 노크로스에 있는 애틀랜타한인회관에서 열린다. 예상 참석자는 250명 정도. 조지아주 보훈처장, 귀넷카운티 관계자 등 정치인과 정부 쪽 인사들, 애틀랜타 총영사 등을 초청했다. 한인뿐 아니라 귀넷카운티 내 미국인 참전용사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기념일 제정 외에 다른 성과도 있었나요?
“작년에 운전면허증과 자동차 번호판에 베트남전 참전용사(Veteran)라는 표시를 해 주는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 주지사가 최종 서명도 했고요. 이건 50개주 가운데 처음이었는데 이로써 한인 참전 용사들도 미국 참전 용사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됐습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이 일을 성사시키기 한인사회 많은 인사들이 힘을 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엔 월남전 참전 유공자회가 있었다.
베테랑 면허증이나 자동차 번호판이 나오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명예죠.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걸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이기도 하고요. 여담이지만 이런 ‘쯩’이 있으면 이런저런 혜택도 있긴 합니다. 일부 매장에선 할인도 받을 수 있고요. 미국 사회가 참전용사들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예우해 주고 관대하게 대해준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배우 김지미씨(오른쪽)와 함께 한 조영준 회장 부부. [사진= 조영준 회장]
# 화제를 바꿔보겠습니다. 미국에 오신지 46년째라 하셨는데 그동안 어떤 일을 하셨나요?
“가전회사 GE(General Electric)에서 일했습니다. 시카고 공장에서 36년을 근무했어요. 지금이야 한국의 삼성이나 LG가 더 유명하지만 한때는 세탁기, 냉장고 등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회사였습니다. 거기서 냉장고도 만들고 세탁기도 만들었습니다.”
그 큰 회사에서 36년이면 대단했군요. 어떻게 그렇게 오래 일할 수 있었나요?
“이민자로서 미국 굴지의 회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일했지요. 제가 입사할 때만 해도 생산 라인에 1000명이 넘게 있었지만 퇴직 무렵엔 자동화 영향으로 불과 90명이 똑같은 일을 했어요. 2~3년마다 바뀌는 매니저들이 계속 직원을 줄여나갔지만 저는 ‘안 잘리고’ 끝까지 있었습니다. 영어도 짧고 컴퓨터도 잘 몰랐지만 성실성 하나는 인정받았었나 봅니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그만큼 맨주먹으로 시작해 성공 신화를 일궜다는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실패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지만 성공의 이유는 거의가 비슷하다. 분야만 다를 뿐 남다른 노력과 근면 성실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켰다는 것이 그것이다. 조 회장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이민 오시기 전 한국에선 무슨 일을 했나요?
“(조금 망설이다가) 사실은 영화판에 있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는 명보극장에서도 일했고요. 결국 배우가 되어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크게 유명해지진 못했지만 이런저런 조역은 많이 맡았었죠.”
어쩐지 민간인(?) 답지 않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졌다 싶었는데 역시 그랬었군요. 기억나는 작품은 있나요?
“김추련 주연의 ‘빵간에 산다(1973)’, 강범구 감독의 ‘일대영웅(1973)’이 떠오르네요. (사진) 신상옥 감독, 배우 김희라씨 영화에도 출연했고요, 주로 깡패들에게 얻어 맞는 조역이었지요. 가수 남진 씨와도 영화를 찍었는데 유일하게 때리는 역할을 해 봤습니다. 하하”
영화 이야기가 나오자 조 회장의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도 더 커졌다.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더니 옛날 사진도 보여주었다. 유명 배우들과 함께 찍은 것도 있고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도 있었다. 젊은 시절 추억이 많을수록 노년이 더 풍성하다는 말이 있다. 옛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는 조 회장을 보면서 왜 다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이것저것 많은 것을 시도해 보라는지 알 것 같았다.
북한에도 다녀오셨다면서요?
“1989년이었습니다. 갑자기 북한 다큐를 찍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달 휴가를 내고 무작정 들어갔죠. 제가 미국 시민권자니까 가능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젊었고, 과거 배우도 했지만 별로 주목을 못 받았는데 북한 다큐 하나 제대로 찍는다면 요즘 말로 한 번 뜰 수 있겠구나 하는 욕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움은 없었나요?
“평양에 내리자마자 북한 요원 3명이 따라붙었지만 그들과 먹고 마시며 금세 친해졌습니다. 덕분에 별다른 제재는 받지 않았어요. 평양을 비롯해 휴전선까지 5박 6일 동안 두루 다니며 이것저것 잘 찍었습니다. 출국할 때도 찍은 필름을 무난히 가져 나올 수 있었고요.”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북한 땅에서 휴전선까지 내려가 봤는데 철책선 너머 남쪽으로 제가 근무했던 곳이 떠억 보이는 거예요. 거기 휘날리는 태극기를 봤는데 정말 울컥하더라고요. 이런 게 바로 애국심이구나 싶었습니다. 이후 미국에 돌아 온 뒤 북한서 찍은 영상을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요. 그때만 해도 북한 정보가 갈급할 때였기 때문에 이럴 때 애국 한 번 하자는 마음이었습니다.”
# 길어지는 얘기를 이쯤에서 접고 현재를 돌아보았다. 마침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과거 월남전까지 다시 소환되고 있다. 베트남에서도 그랬듯이 아프간 역시 명분과 실리에서 별로 얻은 것이 없었다는 비슷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청춘의 한 시기를 보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아무리 좋은 전쟁도 어떤 나쁜 평화보다는 못하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참전 용사들의 젊은 날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폄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라가 불러서 응답했고, 그 부름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고 가치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 70년대 초 이역만리 남국의 밀림을 누볐던 월남전 참전용사들, 그들은 이제 대부분 70을 넘기고 80이 되고 있다. 그들의 피와 땀을 기억하고 예우하는 것은 그들을 불러낸 국가의 당연한 의무다. 동시에 지금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도리이기도 하다.
▶조영준 회장은…
1947년생. 1969년 3월부터 20개월간 백마부대 소속 일등병으로 베트남에 파병됐다. 제대 후 몇몇 영화에도 출연했다. 1975년 도미 후 시카고 GE에서 36년간 일했고 은퇴 후 2013년 애틀랜타에 정착했다. 2019년부터 동남부 베트남전 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종호 애틀랜타 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