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슴이 싸움을 벌였다. 말은 사냥꾼을 찾아가 사슴에게 복수하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사냥꾼은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정말로 복수하고 싶으면 내가 고삐로 너를 조종할 수 있도록 입에 재갈을 물리고 사슴을 쫓는 동안 내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등 뒤에 안장을 얹어야 해.” 말은 이에 동의했다. 결국 말은 사냥꾼의 도움을 받아 사슴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말은 사냥꾼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와요. 입과 등에 채운 것도 풀어주세요.” 사냥꾼이 대답했다. “이봐.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이제 막 마구를 채웠잖아. 난 지금 이대로가 좋단 말야..”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총칼로 권력을 탈취한 게 아니라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반대 세력을 구금·살해하고 의회를 마비시키면서 무지막지한 독재 체제를 만들어 나갔지만, 이 또한 형식적으로는 법적 절차를 따랐다. 독재 체제는 법적 정당성을 통해 완수된다. 히틀러의 집권에는 힌덴부르크의 측근정치와 보수우익세력의 오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힌덴부르크는 참모인 슐라이허 장군의 조언에 따라 1932년 7월 무명의 국회의원인 프란츠 폰 파펜을 총리로 임명했다. 파펜은 힌덴부르크에게 아부해서 순식간에 그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당초 파펜을 자기의 허수아비로 생각했던 슐라이허는 공작을 꾸며 파펜을 실각시키고 그해 12월 총리가 됐다. 친구였던 파펜과 슐라이허는 원수가 됐다. 여전히 힌덴부르크에게 신임을 받고 있던 파펜은 슐라이허를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파펜은 히틀러를 명목상의 총리로 하고 자신은 실세 부총리가 되는 보수우익 연립정권을 제안했다. 파펜의 제안에 히틀러는 11명의 각료 자리 가운데 3자리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나치에서는 빌헬름 프리크가 내무장관, 헤르만 괴링이 무임소장관 겸 프로이센주 내무장관으로 입각했다. 보수정당인 국민당 당수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경제장관 겸 농무장관, 프로이센주 경제장관 겸 농무장관이 됐다. 파펜과 후겐베르크는 자기들이 얼마든지 히틀러를 주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전통적으로 국회 내에서 다수세력이던 사회민주당과 가톨릭중앙당은 히틀러의 집권을 방조했다. 슐라이허 내각 마지막 1주일 동안 그를 지지하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두 정당은 의회 내 다수 의석을 확보한 히틀러가 총리가 되는 것이, 군사독재 정권이나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임명한 ‘대통령 총리’ 정부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기대들이 얼마나 큰 오판이었는지는 그 후의 역사가 증명한다. 그로부터 불과 1년 사이에 나치는 독일을 완전히 다른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히틀러 집권 초기, 히틀러를 지지하는 의회 세력은 나치당과 후겐베르크의 국민당을 합쳐 247석에 불과했다. 과반수에서 36석이 모자랐다. 히틀러는 3월 5일 새로운 국회의원 총선을 실시하기로 했다. 파펜과 후겐베르크에게는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내각 개편을 하지 않겠다고, 즉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1933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경찰은 판 데르 루베라는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를 범인으로 체포했다. 이 사건은 나치돌격대가 정신이 약간 모자라는 루베를 이용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다음 날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비상명령’을 받아 냈다.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공산주의자의 폭력행위에 대한 예방조치’라는 설명이 붙은 이 비상명령에 따라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통신의 자유가 제한되고, 영장 없이 체포·수색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4천여 명의 공산당원, 사회민주당원, 자유주의자들이 체포됐다.
선거 결과 나치는 1722만여 표를 획득, 유권자의 44%의 지지를 얻었다. 나치는 286석을 차지, 후겐베르크의 국민당 52석과 합쳐 원내 과반수를 간신히 넘어섰다. 사회민주당, 가톨릭중앙당, 공산당은 의석의 증감이 있기는 했지만, 원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차지했다. 히틀러가 원하는 것은 원내 과반수가 아니라 ‘독재권력’이었다. 그는 내각에 4년간 국회의 입법권을 위임하는 ‘수권법(授權法)’을 요구했다. 표결을 하기 전에 공산당 국회의원 81명이 대통령 비상명령에 따라 국회에서 축출되고, 10여 명의 사회민주당 의원이 경찰에 억류됐다. 히틀러는 “정부는, 절대로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만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결국 수권법은 가결됐다. 이 법은 이후 히틀러 독재권력의 법적 근거가 됐다.
독일의 유서 깊은 연방제도와 지방자치제도도 무너졌다. 나치는 바이에른 주정부를 접수한 것을 시작으로 주정부를 차례로 파괴했다. 집권 1주년이 되는 1934년 1월에는 ‘독일재건법’을 공포, 지방자치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 정당들도 차례로 해산됐다. 1933년 7월에는 사회민주당이 내무장관의 명령으로 해산됐다. 같은 달 보수계 정당인 가톨릭중앙당(기독교민주당의 전신), 바이에른의 가톨릭인민당(기독교민주당의 자매정당인 기독교사회당의 전신) 등이 자진 해산했다. 히틀러에게 협조했던 후겐베르크는 1933년 6월 사임했고, 그의 정당도 얼마 후 해산됐다. 7월 14일 나치당을 독일의 유일한 정당으로 선언하는 법률이 공포됐다. 노조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도 해산됐다. 모든 노조는 해산되고, 노조 간부들은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 유서 깊은 체육단체나 여행단체, 청소년단체, 여성단체 등도 모두 해산되고 나치 산하조직으로 재편됐다. 언론의 자유도 완전히 무너졌다.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이후 비상명령에 따라 많은 언론사들이 폐쇄됐다. 이후 자유언론을 대신한 것은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였다. 신문과 방송, 출판은 철저히 국가에 예속되어 선전선동 기구로 전락했다.
사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 국민의 최고심판관’이라고 선언했다. 독일제국 최고 법률지도자 한스 프랑크는 법관들에게 “국가사회주의에 대립하는 ‘법의 독립’이란 것은 없다”면서 “판결 때마다 ‘총통이 자신의 입장이라면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를 스스로 반문해 보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이 있자, 나치는 반역죄를 전담하는 인민재판소와 정치범을 처벌하는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히틀러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는 대신 스스로 총통 겸 총리가 됐다. 이후 히틀러는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향해 질주했다.
미국의 역사가 헨리 애슈비 터너2세는 “사실은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당시 독일의 운명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권력을 쥐어주었다”고 말한다. 독일 정치지도자들과 국민들의 가장 큰 실책은 히틀러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는 진화한다. 히틀러(독일)나 무솔리니(이탈리아), 차베스(베네수엘라), 페론(아르헨티나), 후지모리(페루) 등 독재자의 등장은 놀랍게도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들은 포퓰리스트 아웃사이더였으며, 독재자로 등장하기 전에 장차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잠재적 신호들을 보였으나 국민들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때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