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아래 따스한 햇살이 추위를 떨쳐준다. 1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평소 TV로 폭스뉴스를 보던 남편이 오늘은 신문을 펼쳐 들고 오페라를 듣고 있다. 볼륨을 크게 틀고 행복한 그를 보니 여유롭다. 소프라노가 누구냐? 물었더니 유명한 가수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름이 무엇 중요한가. 겉보다 속을 즐기면 되지 하고 나도 오페라에 푹 빠졌다. 음악을 들으면서 작년 12월에 코비드로 세상을 떠난 ‘Il Divo’ 팝페라 그룹의 카를로스 마린을 생각했다. 2003년에 결성된 4명의 멋진 남자들이 오페라와 팝 음악을 열창하는 것이 좋아서 즐겨 들었다. 제각기 특성이 다른 가수들이 창조하는 화음이 무척 매력적인데 그 중에서 늘 눈웃음을 흘리던 카를로스의 갑작스런 죽음이 안타까웠다. 멋진 아리아를 한참 들어도 왠지 기분이 업되지 않았다. 어쩌면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버린 긴 팬테믹의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떠난 것이 어디 사람뿐인가. 주위에서 사라진 것들이 많다.
오늘은 어떤 음식을 먹을까? 하고 남편이 궁리해서 나는 사라진 식당의 음식을 떠올리며 다시 먹어 봤으면 좋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특히 맛있는 음식을 찾는 남편 덕분에 우리 가족은 외식을 많이 해서 식당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앨라배마의 수도인 몽고메리는 인구 20만 정도의 소도시라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 있는 식당이라도 불과 10-15분이면 찾아간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선호하는 지역의 식당들 중에서 사라진 식당들에서 즐겼던 음식이 먹고 싶을 적이 있다.
‘Capitol City Grill’ 은 다운타운에 있던 모텔의 식당이었다. 한인주인이 화끈하게 남부음식을 대접했다. 주정부와 시정부의 직원들이 즐겨 찾았고 나도 멕스웰 공군부대에 근무하며 자주 갔었다. 특히 금요일의 메뉴였던 메기와 닭튀김은 최고의 맛이었다. 해마다 6월25일 쯤에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초대해서 음식대접을 하며 감사를 전했던 좋은 주인은 은퇴하고 타지로 이사갔고 건물은 철거되고 휑한 빈 터만 남았다.
‘Fifth Quarter 스테이크’ 의 샐러드바는 품질 좋은 신선한 채소와 과일들의 전시장이라 아이들이 샐러드 예술품을 많이 만들었다. 빛깔 좋고 짭짤한 앤쵸비는 내가 즐겼고 남편은 부드럽고 두터운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사쿠라 바나’ 는 이 지역에서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본인이 운영한 일식당 이었다. 식당이 문을 닫았을 적에 속이 많이 상했다. ‘Great Wall’ 중식당은 내부 장식이 중국대륙의 우아한 산수화로 품위를 떨쳐서 눈요기에 좋았고 음식 맛도 좋았다. 장소를 옮겼다가 결국은 문을 닫고 주인은 타주로 이사갔다.
‘The Pub’은 지금은 사라진 쇼핑센터 ‘몽고메리 몰’ 내부에 있던 그리스계 주인이 운영하던 식당인데 그집의 그릭 샐러드와 생선요리는 일품이었다. 2005년에 동쪽으로 근사한 건물을 짓고 옮겼지만 옛 장소의 소박함을 잃었다. ‘Sahara’ 식당 벽에는 역대 주지사들의 초상화들이 걸려서 분위기가 무거웠지만 성격 밝은 주인과 맛있는 음식에 자주 찾아 갔었다. 그리고 메뉴에 으깬 감자 요리를 ‘snowflakes’ 부르는 등 예쁜 이름들처럼 음식도 맛있었다.
‘마카로니 그릴’은 온 가족이 좋아했던 이탈리안 식당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식탁을 덮은 하얀 종이에 크레용으로 온갖 그림을 그렸다. 오래전에 문을 닫았지만 빈 건물은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이공 비스트로’ 는 3번이나 장소를 옮겨도 우리는 따라다니며 맛있는 월남음식을 먹었다. 부엌을 담당했던 노부부가 은퇴하면서 식당이 문을 닫았다. 그 집의 음식맛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던 우리는 아직도 다른 월남식당에 적응하지 못한다.
주인이 적극적으로 손님을 돌보던 인디언 식당의 매콤한 카레가 먹고 싶고 중국식당 ‘Mandarin’의 오렌지비프가 먹고 싶다. 그리고 주인이 세상을 떠남으로 문을 닫은 ‘Mr. Gus’ 그리스/이탈리안 식당과 ‘Jubilee’ 생선전문 식당의 음식도 다시 먹고 싶다. 토박이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수다판을 벌리며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셨던 ‘Cool Beans’ 카페도 그립다.
나름의 이유로 추억을 주고 사라진 식당들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다양한 식당을 찾아가서 수고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도 맛집을 찾아 남편과 집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