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 수탈 깊어지자 집단 반기…반영 감정 고조되며 잦은 충돌
렉싱턴 전투로 8년 전쟁 시작…1776년 ‘독립선언’ 역사 바꿔
7월 4일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은 미국의 가장 큰 국가기념일이다. 1776년 이날 13개 식민지가 대영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날은 독립을 이룬 날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배에 처음으로 공식 반기를 든 날이다. 이날 이후에도 독립을 위해서는 당시 세계 최강이던 영국과의 지루하고 힘든 전쟁을 치러야 했고 그 과정은 실로 수많은 고비고비의 연속이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1783년 파리조약에서 국제적으로 독립을 승인받고, 1787년 연방헌법을 제정해 미국이라는 국가를 정식 출범시키기까지는 독립선언 이후에도 11년이란 기간이 더 필요했다.
그렇다면 멀쩡히(?) 잘살고 있던 북미대륙 13개 식민지주는 왜 전쟁까지 불사하며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을까. 미국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모범 답안은 ‘자유’를 갈망해서다. 시민권 시험 문제 풀이집에 제시된 모범답안 역시 그렇다. 높은 세금 때문에, 대표 없는 과세 때문에, 식민지 주둔 영국군의 횡포 때문에 등. 완전한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자치를 누리며 충분히 먹고살 만했던 식민지가 어느 날 갑자기 변해버린 영국의 태도에 위협을 느꼈다는 말이다.
당시 영국의 북미 13개 식민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식민지 개념과는 아주 달랐다. 점령지 주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했던 일제 식민지 같은 곳이 아니었다. 13개 주 식민지인들은 노예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누렸다. 영국이라는 세계 제국의 보호막 아래 알게 모르게 ‘공짜 이익’도 챙겼다. 하지만 영국의 사정이 나빠지면서 식민지 정책도 달라졌다. 영국이 북미에서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계속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심각한 재정 압박에 내몰렸다. 탈출구는 북미 대륙의 식민지밖에 없었다. 영국 의회는 13개 식민지를 상대로 각종 세금을 늘려나갔다. 설탕법, 군대숙영법, 인지법, 타운센드법 등이 그것이다. 식민지 입장에선 모두 식민지인들을 쥐어짜기 위한 악법이었다.
식민지 사람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구호를 외치며 관련법 철폐 운동이 시작됐다. 영국 상품 불매운동도 일어났다. 영국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충돌이 생겼다. 그럴수록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공공연히 등장했다.
저항의 근원지는 보스턴이었다. 1770년 보스턴 주둔 영국군과 식민지 주민 간의 사소한 충돌로 주민 5명이 숨졌다. 식민지 사람들은 이 사건을 ‘대학살’이라 이름 붙였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었다. 반영감정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희생자 장례식엔 당시 보스턴 주민 1만 6천 명 중 1만 명이 참가할 정도였다.
3년 후인 1773년 유명한 보스턴 차(茶) 사건이 터졌다. 식민지 사람들이 차에 부과되는 세금에 반대하며 보스턴 항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 회사 선박에 잠입해 선적돼 있던 수백 상자의 차를 바닷속으로 던져버렸다. 영국의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결국 보스턴항을 폐쇄했고 찻값 보상을 요구했으며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누리던 자치권도 박탈해 버렸다. 4천명의 병력과 함께 새 영국 총독이 파견됐다. 이들의 식량과 숙영지는 다시 식민지가 부담해야 했다.
1773년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은 독립을 갈구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가슴을 불을 지폈다. 사건 발발 200년을 맞아 1993년 발행된 기념우표.
식민지인들은 분노했다. 매사추세츠뿐 아니라 다른 식민지들도 동조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회의엔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 56명이 참가했다. 영국의 강압적 법령에 반대하는 결의안이 채택됐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2차 회의를 소집한다는데도 합의했다.
영국으로부터의 식민지 독립은 이제 시대적 소명이 됐다. 이른바 ‘애국자’들은 연설로, 책으로 대중을 각성시켰다. 패트릭 헨리(1735~1799)는 1775년 버지니아 의회 연설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절규했다. 이 말은 미국에선 이제 유치원생도 아는 명언이 됐다.
토머스 페인(1737~1809)은 1776년 발간된 ‘상식(The Commonsense)’이란 책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또 한 번 각성시켰다. 꿈과 자유의 신대륙이 폭군이 지배하는 작은 섬나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책은 50만부 이상 팔렸다. 당시 식민지 인구는 흑인 노예를 포함해 300만 명 정도였다. 성인 백인 남자들은 거의 모두 이 책을 읽었다는 얘기다.
1776년 7월 4일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절정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13개 식민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엮어냈다. 뿐만 아니라 천부인권과 자유 행복 추구권을 담아냄으로써 세계사적인 문건이 되었다.
영국과의 독립전쟁 첫 총성은 독립선언서 발표 이전인 1775년 4월 19일 매사추세츠 렉싱턴에서 먼저 울렸다. 보스턴 북서쪽 콩코드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식민지 민병대의 무기고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 식민지군 8명이 목숨을 잃었다. 민병대는 격렬히 저항했고 마침내 영국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는 독립전쟁의 서전을 장식한 뜻깊은 전투로 역사에 기록됐다.
식민지 대표들은 다시 필라델피아에서 2차 대륙회의를 열었다. 영국과의 전면 전쟁을 공식 결의하고 식민지 연합군인 대륙군(Continental Army)을 창설했다. 총사령관은 조지 워싱턴이었다.
독립전쟁은 8년간 계속됐다. 그래도 영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나라였다. 전과는 미미했고 몇몇 전투를 제외한 전쟁 기간 대부분 대륙군은 고전했다. 식민지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독립에 동조한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영국 왕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소위 ‘왕당파’ 식민지인이 30% 이상이었다. 미국의 초대 부통령이자 2대 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는 “식민지 인구의 약 3분의 1이 독립을 반대했고 또 다른 3분의 1은 무관심하다”고 얘기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국과의 독립전쟁은 사실상 미국인끼리 싸운 전쟁이라는 얘기도 된다. 실제로 영국에 반대해 싸운 사람 못지않게 영국을 위해 싸운 식민지인도 많았다. 1780년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에 9천명이 지원했을 때 영국군에는 8천명의 왕당파가 복무했다는 기록도 그런 주장의 하나다.
그럼에도 시간은 식민지 편이었다.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지구전으로 버텼다. 몇 차례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 스페인도 식민지 편에 서서 참전을 선언했다. 북미 대륙의 미국 독립전쟁은 이제 국제전쟁이 되었다.
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lee.jongho@koreadaily.com
시민권 시험 문제 풀이
Q 식민지인들은 왜 영국에 맞서 싸웠는가? (Why did the colonists fight the British? )
A 높은 세금 때문에 (because of high taxes) 또는 대표 없는 과세 때문에(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 – 영국 군대가 제멋대로 그들의 집에 숙영했기 때문에(because the British army stayed in their houses (boarding, quartering) / – 자치 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because they didn’t have self-government)
Q 독립선언서는 누가 썼는가? (Who wrote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Q 독립선언서가 채택된 것은 언제인가? (When was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dopted?
A 1776년 7월 4일 (July 4, 1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