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고전작가 중 한 명이다. 인기가 어느정도 인가 하면 셰익스피어, 괴테, 토마스 만, 헤밍웨이보다 더 우위에 있다. 이것은 몇 년 전 네티즌을 상대로 투표한 인터넷 서점(예스24)에서의 결과다. 헤세는 그의 생애를 통해 수레바퀴 아래서, 페터 카멘친트, 크놀프,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 등 수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그 중에 단 한 권이라도 헤세의 작품을 읽지 않은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작년 중앙시니어 센터에서 일곱 번에 걸쳐 낭만의 유럽여행 강의를 했다. 유럽 여행, 크루즈 여행,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스위스 여행 등을 온라인 줌을 통해 시니어들에게 꿈을 심어 드린 것이다. 그 중에서 시니어들이 가장 관심있어 한 것은 독일 칼브와 스위스 몬테뇰라였다. 칼브는 헤세가 태어난 곳이고, 몬테뇰라는 헤세가 마지막 43년을 살고 묻힌 곳이다. 시니어들은 학창시절 읽었던 헤세의 소설을 기억하고 그의 발자취를 찾고 싶어했다. 칼브와 몬테뇰라를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 보기도 했다.
헤세의 마지막 발자취를 찾으려면 스위스 루가노로 먼저 가야한다. 루가노는 이탈리아와 스위스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다. 헤세 박물관이 있는 몬테뇰라로 가려면 루가노에서 노란색 포스트 버스(436번)를 타야 한다.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오고 가는 버스는 하루에 4번씩 밖에 없다. 헛된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려면 정류장에서 버스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루가노 – 몬테뇰라행 노란색 포스트 버스(436번)
헤르만 헤세 박물관 입구
헤세가 사용하던 개인적인 물건과 그림이 걸려 있는 전시관
헤세의 책상, 타자기, 사진이 있는 2층 전시관
헤세가 쓰던 모자, 사진, 엽서 등이 보인다
박물관은 개인 후원자들과 헤세의 둘째 아들 하이너 헤세의 지원으로 1997년 7월 2일 개장했다. 헤세의 탄생 120주년을 맞아 그가 몬타뇰라에서 처음 살았던 카사 카무치 건물에 문을 연 것이다. 박물관에는 책상, 타자기, 안경, 면도기, 펜, 그림 도구, 모자, 우산 등 그가 사용하던 개인적인 물건과 헤세가 그린 수채화, 헤세가 독자에게 보낸 그림이 있는 편지, 번역본, 초판본 등 여러가지 기록들이 전시돼 있다. 헤세는 평생동안 3,000장 정도의 수채화를 그렸으며 35,000장의 답장 편지를 써서 독자들에게 보냈다. 그 중에는 그림 엽서 등 예쁜 수채화 그림을 그려 보낸 것도 있다. 독일 유학생이던 전혜린도 헤세로 부터 엽서를 받았다. 그녀는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 섰으며 ‘데미안’을 번역하여 당대 청년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헤세의 그림이 걸려 있는 2층 전시관
헤세가 사용하던 미술 도구
헤세 박물관에 걸려 있는 헤세의 그림들
헤세의 책상, 타자기, 사진이 있는 2층 전시관
헤르만 헤세 박물관의 3층 전시관
1916년, 헤세의 주치의 랑박사는 심리분석 치료의 한 방편으로 그에게 그림 그리기를 권고한다. 정신과 치료를 마친 헤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몬테뇰라로 거처를 옮겼다. 이혼한 아내(마리아 베르누이)도 정신분열이 악화되자 아이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흩어지게 된다. 장남 브루노는 화가며 친구인 쿠노 아미에트에게 맡겼고, 차남 하이네는 육아원으로 보내졌으며, 막내 마르틴은 위탁 가정에 맡기게 됐다. 이때 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헤세는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데미안, 어느 청춘 이야기’를 출간하고 1920년에는 바젤 미술관에서 수채화 전시회를 열었다. 1923년에는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헤세 박물관 창밖으로 바라 본 몬테뇰라 마을의 풍경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헤세가 53 세 때 발표한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자신의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말한다. 방랑자로 많은 여인들을 만나는 골드문트가 헤세였을까. 실제로 그는 어머니 품같은 마리아 베르누이를 만나 세 아들을 낳았으며, 20살이나 어린 루트 벵거를 만나 두 번째 결혼하고 3년 후 헤어졌다. 그것 뿐인가. 그는 방랑자요 나체주의자로 발가벗고 있기를 한때 즐기기도 했다. 니논 돌빈은 베를린 대학 재학 시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고 그의 열렬한 팬이 된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사진을 동봉하고 “당신에게 내가 누구인지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어요”라는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는 “내 안에 무언가 강렬한 힘을 느껴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밖에 없었어요”라는 고백을 한다. 11년이 지난 후 미술사학자가 된 니논(당시 36세)은 헤세(54세)의 3번째 아내가 됐다.
1946년, 헤르만 헤세는 괴테 문학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전세계에서 날아온 축하 편지는 7,000통에 달했다. 1947년에는 베른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헤세는 몬테뇰라에서 정원을 가꾸고 낙엽 태우는 것을 좋아했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니논과 함께 천천히 산책을 즐겼다. 루가노 호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몬테뇰라는 그림 그리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화가가 된 큰아들 브루노와 호수, 산, 작은 마을을 함께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헤세는 훌륭한 작가였지만 화가로서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920년 바젤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다음해 화집을 출간했으며 사후에는 도쿄, 뉴욕, 샌프란시스코, 몬트리올, 시카고, 마드리드, 룩셈부르크, 함부르크, 삿포로, 서울 등지에서 대대적인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그래서 전시관에는 헤세의 그림과 아들 브루노가 그린 수채화도 수십 점이 함께 전시돼 있다. 어렸을 때 병약하여 헤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막내 아들 마르틴은 사진작가로 성장했다. 헤세의 유명한 사진 가운데 다수가 바로 그가 촬영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마르틴은 196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몬테뇰라에서 바라 본 루가노 호수의 풍경
루가노 호숫가 산책길
1962년 8월 9일, 헤르만 헤세의 주치의 닥터 몰로는 니논의 전화를 받는다. 남편이 아침식사 시간이 넘었는데 내려오지 않는다는 다급한 전화였다. 당시 헤르만 헤세의 서재 열쇠는 헤세와 주치의만 가지고 있었다. 헐레벌떡 카사 로사로 달려 간 주치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니논을 안심시키며 서재로 올라 갔다. 방문을 열자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헤세의 모습이 침대 위에 보였다. 그의 입술에는 피가 몇 방울 맺혔고, 왼쪽 손에는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책상에는 그의 마지막 시, ‘부러진 나뭇가지의 삐걱 소리’ 원고가 놓여있었다.
한국의 김재혁 교수가 번역한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툭 부러진 나뭇가지, 벌써 여러 해 동안 그대로 매달려, 바람 불면 삐걱대며 메마른 노래를 부른다, 잎사귀도 다 떨어지고, 껍질도 없이, 벌거벗고 창백한 모습, 기나긴 인생길에, 기나긴 죽음의 길에 이젠 피곤한가 보다. 그래도 단단하고 끈질기게 울리는 그의 노랫소리, 버팅기는 소리, 하지만 남몰래 두려운 소리, 여름 한 철 만 더, 겨울 한 철만 더.
죽음이 다가 오는 시간 그는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으며 주님을 찾았던 것이다.
헤세는 1877년 개신교 선교사인 부친 요하네스 헤세와 모친 군데르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가는 스위스 출신으로 외할아버지는 학식 높은 인도 선교사였다. 1911년 헤세가 인도를 여행한 후 소설 싯다르타를 발표한 것도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1891년 14세가 된 헤세는 선교사 수업을 받기 위해 마울브론 수도원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헤세는 선교사 보다는 시인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 다닌지 6개월만에 도망치다 붙잡혔으며 학교로부터 엄한 처벌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헤세는 우울증에 빠졌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자살까지 생각하는 극한 상황이 되자 아버지는 그를 다시 칼브로 데리고 왔다. 두 달 정도 정신병원에서 요양한 그는 칸슈타트 고등학교에 입학 7학년 수료 자격 시험을 치렀다. 헤세는 이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다. 성숙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지어 있는 것 보다는 홀로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헤세가 사용하던 안경과 안경집
헤세의 그림책과 그가 사용하던 여러개의 붓
헤세의 그림과 그의 싸인
헤세는 튀빙겐으로 가서 헤켄하우어 서점 점원이 됐다. 그는 이곳에서 신학, 언어학, 법학 등 서적 분류하는 일을하며 책을 읽고 틈만 나면 시를 썼다. 서점에서 12시간씩 일하며 공부한 책으로는 그리스 신화, 신학, 문학, 철학 등 다채로웠다. 특히 괴테, 레싱, 실러, 니체 등의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남들이 모두 쉬는 일요일에도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와 소설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그의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다. 이후 그는 정진하여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시간, 헤세는 부러진 나뭇가지가 되어 주님을 찾았다. “주여! 불쌍한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그의 외침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온다. “헤세야,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었다.” 마음이 평온해진 헤세는 그동안 방황했던 방랑자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다. 헤세는 몬테뇰라 아본디오 성당 묘지에 묻혔다. 1년 후 니논도 그의 곁에 묻혔다.
헤세 박물관 입구에 있는 헤르만 헤세의 사진
글, 사진 / 곽노은 여행작가
30년간 수십차례 유럽을 여행하며 유럽의 골목 구석까지 한눈에 꿰고 있는 유럽 여행의 구루. 20년간 워싱턴 중앙일보에 여행 칼럼을 기고했고 유럽 배낭여행 강좌와 원격 화상 강좌를 통해 미주 한인들을 위한 유럽 여행 전도사로 활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