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검프’ 촬영지 가보고
타이비섬 바다에 발도 담그고
도심 공원·식민지 시대 옛건물
“보고 듣고 살피며 견문 넓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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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속에 어떤 게 들어있는지, 네가 어떤 초콜릿을 고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란다.”
톰 행크스 주연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영화가 1994년에 나왔으니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봤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역경 극복 스토리는 볼 때마다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몇 년 전 애리조나 유타 접경지를 여행할 때 영화 속 주인공이 달리던 ‘모뉴먼트밸리’ 인근 도로를 일부러 찾아가 똑같이 뛰어보기도 했었다. 그때의 감격(?)을 조지아, 사바나에서 다시 한번 맛봤다. 인생 초콜릿 상자 대사가 나오는 장면을 촬영한 현장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사바나(Savannah)는 열대 초원지대를 일컫는 그 사바나(Savanna)가 아니다. 에이치(h) 한 글자가 더 들어간다. 사바나는 조지아 남쪽의 항구 도시다. 뉴스에도 자주 나온다. 수출입 물동량이 급증하면서 LA 롱비치나 뉴욕 못지않은 중요 항구가 됐기 때문이다. 조지아치고는 꽤 남쪽이어서 애틀랜타와는 기후와 식생이 많이 다르다. 팜 트리도 있고, 나무에 이끼도 주렁주렁 달리고 겨울에도 별로 춥지 않다.
사바나 도심의 자갈길. 식민지 시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애틀랜타에서 가면 차로 4시간 정도, 당일 여행으로는 다소 벅차다. 그래도 일찍 서두른다면 웬만한 곳은 다 섭렵하고 올 수 있다. 하루 자고 온다면 훨씬 다채롭고 넉넉한 일정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지난해 9월 혼자서 한 번, 그리고 연말에 가족여행으로 또 한 번 사바나를 다녀왔다. 모두 1박 2일 일정이었다.
조지아는 1732년 북미 첫 13개 식민지 중 마지막으로 영국 식민지가 됐다. 사바나는 그 무렵 개발된 조지아 최초의 계획도시다. 1786년까지 조지아 주도이기도 했다. 면화와 담배 수출항으로 번창했다. 남북전쟁 때는 남군의 최후 보루였다. 애틀랜타를 함락시킨 북군은 쓰나미처럼 진군해왔다. 남군은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1864년 12월 20일, 결국 북군에 함락됐다. 북군 총사령관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은 사바나를 링컨 대통령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헌정했다. 그 덕분인지 애틀랜타와 달리 식민지 시대 저택이나 건물들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때 살아남은 고풍스럽고 유서 깊은 건물들이 지금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됐다.
포트 풀라스키 요새. 연방 공원관리국 관할이라 보존,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여행은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멋진 추억을 남기려면 많이 보고 들어야 한다. 관광(觀光)이 아닌 견문(見聞)을 해야 한다. 읽고 쓰는 것까지 더한다면 금상첨화다. 정보를 찾고, 메모하고, 생각을 보태보자는 말이다. 어디를 가든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여행 좀 한다는 사람이면 안 읽은 사람이 없다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제1권 머리말에도 나온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사바나는 그렇게 하기에 최적의 여행지다. 도시 전체가 공원이고 사적지이고 생태공원이다. 이런 도시를 갖고 있다는 것도 조지아 사람들의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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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맛은 걷는 데 있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봐야 보일 게 보이고 느껴지고 알게 된다. 사바나에선 거의 모든 명소가 모여 있는 역사지구(Historic District)가 그렇다.
시작은 포사이스 공원(Forsyth Park)에서부터다.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이끼(Spanish Moss) 축축 늘어진 고목들이다. 마치 ‘쥐라기 공원’ 영화 속 정글에 들어온 것 같다. 분수대 주변으로는 나들이 나온 연인들, 가족들의 사진 찍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길도 예쁘다. 화가, 토산품 파는 좌판대, 즉석 공연을 펼치는 예술가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주변 길로는 마차와 자전거 탄 관광객들이 바쁘게, 혹은 여유롭게 오간다. 엽서에나 나올 법한 예쁜 트롤리버스도 보인다. 붉은 벽돌 건물들은 세월의 더께가 쌓이고 쌓여 기품이 있다. 예쁜 기념품 가게나 식당들 역시 기웃거리는 자체가 재미고 휴식이다.
포사이스공원은 사바나의 중심이다. 축축 늘어진 이끼가 정글을 이루고 관광객들은 분수대 등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기에 바쁘다.
시내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각기 다른 이름의 광장(Square)이 이어진다. 치프와, 엘리스, 몬터레이, 프랭클린, 컬럼비아, 매디슨 등등. 광장마다 벤치가 있고 주민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해바라기를 한다. 그중 치프와 광장(Chippewa Square)이 바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시작과 끝 장면을 찍은 곳이다.
주인공이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고 울창한 나무 사이로 깃털 하나가 바람결에 살랑살랑 날아오는 바로 그 장면이다. 이 유명한 장면을 찍은 곳에 그때 그 벤치도 없고 안내문 하나 없다. 나처럼 알음알음 소문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만 아는 비밀 장소로 숨겨두기로 작정한 듯싶었다.
주인공 톰 행크스가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벤치는 근처 사바나 역사박물관(Savannah History Museum)에 가면 볼 수 있다는 것을 여행에서 돌아온 뒤 뒤늦게 알았다. 그래도 후회되지는 않았다. 주인공이 앉았을 법한 고목 아래 서서 잠깐이나마 영화 속 ‘초콜릿 상자’의 교훈을 되새김질해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바나 도심 치프와 광장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시작과 끝 장면 촬영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한인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바나 시청 건물. 주변으로 고풍스러운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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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는 개척 당시부터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실려 오던 관문이었다. 그래서 사바나엔 흑인 관련 사적지가 많다. 1775년 완공된 북미 최초의 흑인 침례교회(The First African Baptist Church)도 그중의 하나다. 흑인 노예 장터, 독립 전쟁 참전 흑인 용사 기념비도 보았다. 일부러 찾아다닐 것까지는 없더라도 걷다가 마주치면 안내 간판은 한 번 들여다본다면 여행이 더 풍성해질 것 같다.
꼭 걸어보라 권하고 싶은 곳은 사바나 강을 끼고 있는 리버프론트(Riverfront)다. 한쪽은 강물, 한쪽은 옛 상점과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고 고급 호텔도 이곳에 다 몰려있다. 사바나강을 가로지르는 높다란 현수교나, 강변에 정박해 있는 대형 유람선 리버보트를 배경으로 셔터만 눌러도 작품이 된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이곳에서 하룻밤 묵는 것도 좋겠다. 경치도 보고 걷기도 하고 일석이조, 비싼 값은 할 것 같아서다.
사바나강을 끼고 있는 리버프론트. 멀리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인다. 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리버보트’는 예약을 해야 탈 수 있다.
도심 걷기가 끝나면 바닷가도 가봐야 한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20~30분 거리의 타이비 아일랜드(Tybee Island)다. 나도 사바나 갈 때마다 이곳을 찾아 대서양에 발을 담갔다. 백사장 고운 모래를 맨발로 밟으며 한참을 걸었다. 간질간질한 발바닥 감촉이 좋았고 발끝을 핥고 가는 바닷물은 미지근했지만 싫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사람은 섬 초입의 등대 박물관을 둘러보면 된다. 입장료 10달러를 내면 건너편 전쟁 박물관(Battery Garland)까지 함께 관람할 수 있다.
굳이 한 곳을 더 추천한다면 타이비 아일랜드로 건너가는 길목에 있는 포트 풀라스키 내셔널모뉴먼트(Fort Pulaski National Monument)다. 준 국립공원답게 식민지 시대 초기부터 150년 이상 사바나강 하구를 지키던 요새로 대포와 성벽, 남북전쟁 당시의 전황이 잘 전시되어 있다.
글, 사진 / 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