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이어령 선생이 남긴 말이다. 평생을 바쳐 세상에 이야기를 보탠, 한국 지성의 대들보인 그가 26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말년의 그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공유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도록 했다. “희랍어에서 온 단어 자궁(wombㆍ움)과 무덤(tombㆍ툼)은 놀랄만큼 닮아있다. 인간은 태어나는 게 죽는 거다. 기저귀가 까칠한 수의와 닮지 않았나. 죽음은 인간을 멸하는 게 아니라 풍요하게 만든다.” 복막에서 시작한 암이 퍼져나갔지만 수술을 적절한 시점에 중단하고 집에서 지냈다. 병원에서 태어나고 거기에서 죽는 대신,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했다.
젊은 시절엔 비평적 글쓰기를 무기로 한 ‘문화 투사’에 가까웠다. 1956년 평론 ‘우상의 파괴’로 문단을 뒤흔들며 나타났다. 김동리ㆍ황순원ㆍ서정주 등 기존 문단의 안이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었다. 이어 59년 문학의 사회 참여를 비판한 평문 ‘작가의 현실 참여’는 한국 문단을 다시 각성시켰다.
그는 문학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창조력이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기성 문인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문학 연구자로도 명성을 얻었다. 시인 이상의 작품에 몰두해 신비화된 삶에서 작품을 독립시키는 문학적 해석을 내놨다.
고인의 일은 문명비판, 문학창작 뿐 아니라 문화기획, 교육까지 확장됐다. 무엇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을 총지휘하며 여러 장면을 역사에 새겼다. 8세 굴렁쇠 소년이 넓은 잔디를 가로질렀던 장면은 이 선생의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여섯 살 때 굴렁쇠를 굴리며 보리밭 길을 가는데 화사한 햇볕 속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또 당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에는 모두가 손을 편 채 맞잡고 강강술래를 추는 한국식 화합이 녹아있었다. 본래 영어로 된 가사가 있지만, 고인이 아이디어를 내서 ‘벽을 넘는다’는 의미를 강조한 번역 가사로 불렀다. 올림픽 이후 이 선생은 1990년부터 1년동안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대학과 언론에서도 고인의 역할은 컸다.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30여년을 재직하고 2001년 석좌교수로 은퇴했다. 72년엔 월간 『문학사상』의 창간멤버로 주간을 지냈다. 활동영역은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다. 80년대엔 일본 동경대학교 객원 연구원,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 교수로 재임했다. 중앙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했는데, 처음 서울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임명됐을 땐 불과 26세였다. 2001~2015년엔 중앙일보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60여년동안 고인이 남긴 저작은 130여 종에 이른다. 문학비평으로 시작해 소설, 시, 대담, 에세이 등을 쏟아냈다. 고인의 시각은 날카롭게 앞을 향해있었다. 한국이 배고픔에 빠져있던 68년엔 산업화를 내다보며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냈다. 산업화가 한창일 때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으로 새로운 주제를 제시했다. 시대가 바뀌어 사회 전체에 디지털 열풍이 불 때는 아날로그와의 융합을 이야기하는 ‘디지로그’를 선언했다. 모두가 무엇엔가 빠져있을 때 고인은 그 다음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그의 눈은 다시 인류의 인간적 미래를 향했다. 이처럼 현재와 미래를 앞서서 읽어가며 써내려간 저작 중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 사회를 놀라게 했고 『지성에서 영성으로』『가위바위보 문명론』『보자기 인문학』『지의 최전선』등은 지성의 장대한 여정을 증명했다.
고인이 발견해낸 또다른 키워드는 ‘창조’였다. 그는 한국의 위상에 대해 “남의 뒷통수를 따라가기만 하다가 앞장을 서게 된 처지다. 갑자기 벌판이 눈 앞에 360도로 펼쳐진 것”이라고 비유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무언가를 모방하지 않고 새로 만들어내는 ‘창조’였다. 2009년엔 각계 각층의 인사를 멘토로 하는 창조학교를 만들었고 군사력, 경제력에 앞서는 창조력을 강조했다.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원로 지식인은 마지막까지 사유와 저술을 멈추지 않았다. 2020년 2월 ‘한국인 시리즈’의 첫 책 『너 어디에서 왔니』를 냈다. 개인적 기억, 생물학, 역사, 과학 지식을 동원해 한국인의 문화유산을 설명하는 이야기였다. 총 12권으로 예정해놓은 한국의 문화 유전자에 대한 집필은 마지막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자택의 서재를 병상으로 바꾸고도 집필과 퇴고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두번째 책인 ‘젓가락 유전자’를 퇴고 중이었다.
출판사 파람북의 정해종 대표는 “출간을 4월 정도로 잡고 있었고, 나머지 책도 모두 80% 이상 원고가 완성돼 있다”고 전했다. 『알파고와 함께 춤을』『회색의 교실』등으로 이어지는 시리즈다. 마지막 대작에 대해 그는 “나는 대학 교수도, 장관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이야기꾼이다. 어린 애가 할아버지가 돼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고인은 2017년 암 선고를 받았지만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하지 않은 채 병원에서 건강 체크만 하며 지냈다. 젊은 시절 지성으로 한국인의 정신을 이끌었다면, 말년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우리를 숙고하게 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을 때도 또 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꽃이 보인다. 암 선고를 받고 내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난 후에 역설적으로 가장 농밀하게 산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건국대 명예교수), 아들 이승무(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 이강무(천안대학교 애니메이션과 교수)가 있다. 장녀인 이민아 목사는 2012년 위암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문화체육관광부 황희 장관이 장례위원장인 문체부장(葬)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은 다음 달 2일 오전 10시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된다. 빈소는 서울 연건동의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은 다음 달 2일 오전 9시다.
김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