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안 댄 듯 관리된 ‘무위자연’
넓고 평탄한 길 걷고 뛰기 좋아
숲속 골짜기 시냇물도 시원
# 서울엔 한강, 부산엔 낙동강, 애틀랜타엔 채터후치강(Chattahoochee River)이 있다. 채터후치강은 조지아 최대 강이다. 길이가 약 420마일(약 680km)로 테네시 접경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발원해 애틀랜타 주변 구석구석을 휘감아 돌아간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서는 앨라배마와 주 경계를 이루고 다시 플로리다와 주 경계를 이루면서 세미놀 호수(Lake Seminole)까지 흘러간다. 플로리다 땅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애팔래치아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종착지는 멕시코만이다. 채터후치라는 말은 얼룩이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인디언 원주민 단어 차토(chato=rock)와 후치(huchi=marked)에서 유래됐다. 강 상류 북쪽 산악지대에서 얼룩덜룩한 대리석이 많이 나온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채타후치강은 조지아 최대의 강이다. 아침 동트기 직전 코크란 쇼어스 트레일 입구에서 본 강물.
애틀랜타 일대 채터후치강 주변은 곳곳이 공원이고, 트레일이고, 레저 공간이다. 처음부터 휴양지였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방치되어 있다가 1978년 연방 공원관리국이 관할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레크리에이션 공원(Chattahoochee River National Recreation Area)으로 지정된 곳은 도심 구간을 흐르는 48마일(77km)이다.
공원이라 해도 자잘한 편의시설은 별로 없다. 주차장, 화장실 외에 이따금 안내 표지판만 보일 뿐이다. 강기슭을 봐도, 숲길을 걸어도 인공의 흔적을 최대한 안 남기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지저분하지만 깨끗하고, 불편한 듯 편안하다.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오해는 말자. 무위란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다. 미국식 자연보호 방식이 원래 이런 것 같다.
쇼어스 트레일 입구 매표소. 사람이 없을 때는 바코드를 찍어 온라인으로 입장료를 내면 된다.
# 별다른 계획 없는 주말 아침이면 으레 채터후치 강변, 그중에서도 코크란 쇼얼스 트레일(Cochran Shoals Trail)을 찾아간다. 트레일 대부분은 넓고 평탄한 강변 산책길로 1시간 정도면 한 바퀴 돌 수 있다. 거리는 3.1마일. 걷는 사람도 많고 뛰는 사람도 많다. 좀 더 걷고 싶다면 트레일 반환점 부근에서 이어지는 소프 크리크 트레일(Sope Creek Trail)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면 된다. 숲속 길은 여러 갈래다.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골라 걸으면 된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지 지금까지 걸었던 강변 산책로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다. 꼬불꼬불 울퉁불퉁 돌고 도는 짙은 숲속엔 언덕도 있고 작은 개울도 흐른다. 가끔 산악자전거도 지나간다. 자전거가 방해된다 싶으면 노바이크(NO BIKE) 루트를 이용하면 된다.
코크란 쇼어스 트레일은 채타후치 강변의 대표적 하이킹 코스다. 걷는 사람만큼 달리는 사람도 많다.
꼽아보니 지난해 초여름부터 이곳을 드나들기 시작한 이래 매달 두세 번은 가는 것 같다. 지난 주말에도 다녀왔다. 아침 7시 30분. 두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곳을 걸을 때면 늘 동행하는 분들이다. 관심사는 다르지만 연배가 비슷한데다 너그럽고 앎이 많아 만나면 늘 배움이 있다. 배움 동무는 학우(學友), 글동무는 문우(文友)라고 하는데 걸으면서 만났으니 길동무, 도반(道伴)이 낫겠다. 바른길을 찾으며, 함께 인생 공부를 해 나가는 벗, 60 목전에 만난 도반들이다.
3월이 코앞인데도 아침 기온이 쌀쌀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부지런한 사람들이 벌써부터 걷거나 뛰고 있다. 정확하게 7시 30분, 우리도 발걸음을 내디뎠다. 강변을 따라 걷다가 숲속 가장 먼 트레일을 돌고 돌며 두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심장을 박차고 나간 피가 손끝 발끝까지 이르며 온몸을 데워주는 것 같았다. 걷기를 끝내고 늘 그랬던 것처럼 근처 브런치 집으로 옮겨 커피와 빵으로 담소를 나눴다. 화두는 늘 건강, 행복 아니면 삶의 보람 찾기다. 걸어온 길은 다르지만 바라보는 곳은 결국 비슷해져 감을 확인하는 자리다. 걸을 때도, 걷고 난 뒤에도 주고 받는 대화가 그래서 즐겁다.
쓰러진 나무를 잘라 습지 위에 간이 다리를 만들었다.
강변 트레일은 숲속 소프 크리크 트레일로 이어진다. 자전거도 다니고 거북이도 보인다. 자전거가 싫으면 노바이크 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 코크란 쇼얼스 트레일을 처음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러니까 1년 전 이맘때다. 젊은 시절 좋아했던 가수 이지연이 유명한 셰프가 되어 애틀랜타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에어룸마켓 바비큐(Heirloom Market BBQ)라는 곳인데 주말 하루 날 잡아 찾아갔다. 투고(To Go)만 하는 집이었음에도 손님들로 왁자했다. 이지연은 없었다. 제일 잘 나간다는 메뉴 두 개를 주문했다. 바로 맛보고 싶었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구글맵으로 가까운 공원을 검색했더니 채터후치 강변, I-285 고속도로 인접한 곳, 이곳으로 데려다주었다. 강가에 앉아 ‘이지연표’ 햄버거와 돼지갈비를 먹었다. 스마트폰으로 그의 노래도 들었다.
셰프로 인생 2막을 개척한 가수 이지연의 코리안 바비큐 식당. 코크란 쇼어스 트레일에서 5분 거리다.
“해가 뜨면 찾아올까 / 바람 불면 떠날 사람인데 / 행여 한 맘 돌아오면 / 그대 역시 외면하고 있네 // 세월 가면 잊혀질까 / 그렇지만 다시 생각날 걸 / 붙잡아도 소용없어 / 그대는 왜 멀어져 가나 // 이제 모두 지난 일이야, 그리우면 나는 어떡하나 / 부질없는 내 마음에 / 바보같이 눈물만 흐르네 / 바람아 멈추어다오, 바람아 멈추어다오”
최근 그 이지연이 9년을 함께해 온 약혼자와 결별했다는 뉴스를 봤다. 요리 공부하면서 만난 미국인이었다. 함께 식당을 열었고 조지아 최고 맛집 평판을 얻는데도 그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뉴스가 나오던 날, 다시 이 노래를 들었다. 전에는 무심히 흘려 듣던 가사 였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인생살이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만나고 헤어짐이야 으레 있는 일이라지만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바보같이 눈물만’ 흘리지 말았으면 싶었다. ‘바람아 멈추어다오’라며 애걸도 말았으면 좋겠다. 대신 가슴 펴고 이곳, 가까운 채타후치 강변이라도 자주 걸었으면 좋겠다. 걷다 보면 또 다른 친구가 생길 테니까. 나무가, 숲이, 계곡이, 강물까지 모두 친구가 될 테니까.
나바호 인디언 부족의 노래 한 소절로 글을 맺는다. “나는 땅끝까지 가 보았네 / 물 있는 곳 끝까지도 가 보았네/ 나는 하늘 끝까지 가 보았네 / 산 끝까지도 갔었네 / 친구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네”
#메모 : 트레일 입구까지는 둘루스 한인타운에서 30분쯤 걸린다. I-285 고속도로 22번 출구 노스사이드 드라이브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인터스테이트 N 파크웨이 선상, 강 다리 바로 건너 오른쪽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비는 5달러. 1년치는 40불이다. 국립공원 1년 패스(America the Beautiful)도 통한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