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당선인은 1960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교수인 학자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소득 불평등을 연구해 온 저명한 경제학자다. 이화여대 교수였던 어머니는 결혼 후 학교를 그만뒀다.
한국경제학회 회장을 지낸 윤 교수는 강단 있는 원칙주의자로 유명했다. 그가 석사 학위를 받고 교수에 임용된 50~60년대엔 간단한 논문을 내면 박사 학위를 쉽게 딸 수 있는 ‘논문 박사’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윤 교수는 지인들 권유에도 “그런 식으로 학위를 받는 게 무슨 소용이냐”며 거부했다.
이런 가르침은 윤 당선인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윤 당선인이 대학생 때 친구들과 남의 밭에 들어가 콩을 서리해 먹은 일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윤 교수는 “농부가 힘들게 지은 농작물을 재미로 훔쳐서는 안 된다”며 마당에 있는 호스로 윤 당선인을 매질했다.
술과 친구 좋아하는 고시 신선(神仙)
윤 당선인은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 뜻에 따라 1979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윤 당선인이 대학에 입학한 해는 혼란의 시기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1980년 법대 선배들이 대학 축제를 맞아 모의재판을 기획했다. 윤 당선인은 여기서 재판장을 맡아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 일이 문제가 되면서 그는 3개월 동안 강원도 친척 집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윤 당선인의 꿈은 검사가 아닌 법대 교수였다. 사법고시를 치르는 것도 교수가 되려는 꿈의 일부였다. 실무 경험 없는 사람이 교수가 되는 건 학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병역은 양 눈의 시력 차이가 큰 ‘부동시(不同視)’로 면제받았다.
윤 당선인은 사람 챙기는 것과 술자리를 좋아하고 오지랖도 넓은 편이라 사법고시 2차에 번번이 미끄러졌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윤 당선인은 친구 조부모가 상을 당하면 상여를 메고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고 한다. 신림동 고시촌의 살아 있는 전설로 여겨지며 그에게 붙은 별명이 ‘신림동 신선’이다.
윤 당선인은 사법고시 9수 끝에 1991년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23기 동기로는 박범계 법무부 장관, 조윤선 전 장관, 강용석 변호사 등이 있다.
권력 수사를 마다치 않는 강골 검사
윤 당선인이 첫 직장인 검찰 생활을 시작한 건 34세였다. 윤 당선인의 ‘강골’ 기질이 처음 싹을 드러낸 건 1999년이었다. 윤 당선인은 김대중 정부 경찰 실세인 박희원 경찰청 정보국장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박 국장은 호남 출신으로 모든 경찰 정보를 주무르는 핵심인사였다. 이후 윤 당선인은 검찰 내부에서도 ‘보통이 아닌 녀석’이라는 평가를 받는 동시에 ‘승진은 물 건너간 외골수’라는 비아냥도 받았다.
윤 당선인은 2002년 잠시 검찰을 떠나 1년간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명재 전 검찰총장이 “나이도 있고 이제 결혼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권유한 것도 변호사 생활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변호사가 돼서도 검사 체질을 못 버려 동료들을 당황하게 했다. 의뢰인에게 “그런 일 하면 안 되잖아요”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검찰로 복귀한 윤 당선인은 2003년부터 권력 중심부를 타격하는 대형 수사를 맡아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법 대선 자금 수사를 맡아 측근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사건 당시 노무현 후보 선대위 정무팀장)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을 구속기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를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2006년 현대자동차 비자금 수사 담당 때는 정몽구 회장을 구속기소 했고, 2011년엔 부산 저축은행 사태 수사를 맡아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2012년엔 아는 스님의 소개로 52세에 늦깎이 결혼하며 ‘검찰총장(검찰 총각 대장)’이라는 짓궂은 별명도 떠나 보냈다. 띠동갑인 아내 김건희씨는 윤 당선인에 대해 “남편은 거짓 없고 순수한 사람이다. 가진 돈도 없고 내가 아니면 결혼을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결혼 당시 윤 당선인의 통장엔 2000여만원 밖에 없었다고 한다.
윤 당선인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사건은 2013년 벌어졌다. 윤 당선인은 박근혜 정부 첫해 국정원 댓글 사건의 수사팀장을 맡았다. 윤 당선인은 본디 스타일대로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에게 칼을 겨눴다가 검찰 수뇌부를 비롯해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업무에서 배제됐다.
윤 당선인은 이틀 뒤 국정감사장에서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야당 도와줄 일 있나, 야당이 이걸 가지고 정치적으로 얼마나 이용을 하겠냐’라고 말했다”라며 정권과 검찰 상부의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라는 말을 남긴 것도 이자리였다.
적폐청산의 주역
윤 당선인은 이 일로 정직 1개월 징계를 받았다. 이후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에서 대구고검 평검사로 좌천됐다. 당시 검찰 지인들에 따르면 길을 가다 윤 당선인을 보고도 본체만체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3년이 채 되지 않아 윤 당선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국정농단 사태를 특검으로 수사하라는 국민의 압력이 거세졌다. 박영수 특검이 시작됐고 윤 당선인은 수사팀장으로 합류했다.
윤 당선인은 삼성 수사를 맡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뇌물죄로 구속기소했다. 박근혜·최순실·이재용 모두 구속 수감되면서 특검은 성공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마무리됐다. 윤 당선인은 이후 ‘국민 검사’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2017년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윤 당선인을 검찰 수사의 핵심조직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했다. 윤 당선인은 임명된 즉시 과거 자신을 좌천시킨 ‘국정원 댓글 사건’을 파헤쳤다. 전 정권에서 수사를 방해했던 검사들과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을 구속기소했다. MB의 최측근 비서관까지 수사한 끝에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구속기소했다.
수사는 대체로 국민의 지지 속에 마무리됐지만, 1년 새 보수 정권의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수감시켜 윤 당선인은 보수를 무너뜨린 주범 취급을 받기도 했다.
대통령감으로 지목된 검찰총장
2019년 7월 문 대통령은 윤 당선인을 차기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전임 총장에서 무려 다섯 기수를 뛰어넘은 파격으로 검찰 역사에 없는 기록이다. 문재인 정부는 윤 당선인이 ‘검찰 개혁’의 주역이 돼주기를 기대했다. 하나의 축은 윤 당선인이었고, 또 하나의 축은 한 달 뒤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는 조국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기대와 달리 전개됐다.
윤 당선인이 총장 취임 뒤 휴가를 간 동안, 딸의 입시 비리의혹 등 조국 법무부 장관 관련 비리 의혹이 터져 나왔다. 윤 당선인은 이후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이 수사를 할지 말지에 대해 저도 인간이라서 번민을 했다”고 말했다. 결국 ‘전격 수사’ 모드에 돌입한 윤 당선인은 조국 전 장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동시다발적 압수수색을 벌였다.
조국 수사에 대한 국민 여론은 극명히 나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윤 당선인은 유재수 전 부산경제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 송철호 울산시장 관련 선거 개입 의혹,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 등 정권 핵심 인사에 대한 수사를 밀어붙였다. 이러다 보니 청와대가 임명한 검찰총장을 여당이 비난하고 야당이 옹호하는 보기 힘든 광경도 연출됐다.
조국이 물러나고 임명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강경하게 윤 당선인을 몰아붙였다. 검찰 인사를 단행해 검찰 내 윤 당선인 사단을 대거 교체했다. 문재인 정부의 압도적 신임을 받으며 검찰총장이 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역적으로 몰리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단숨에 차기 대권 주자에 이름을 올렸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3월 “상식과 정의가 무너지는 걸 더는 지켜보기 어렵다”며 검찰총장직을 사퇴했다. 6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고 한 달 뒤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야당 대선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또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9일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경기도 부천역 앞 마루광장에서 열린 유세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