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추위를 견뎌낸 사람들은 따뜻한 남풍이 불어오는 남쪽으로 봄맞이를 오는데 나는 따스한 남부에서 겨울 추위를 맛 보러 북쪽으로 갔다. 지난달 초에 일어났던 사이버 사기 사건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은행들의 자체 조사는 끝없는 인내심을 요구했다. 그 모든 머리 아픈 일에서 잠시 탈출했다.
1749년에 형성된 버지니아주의 올드타운 알렉산드리아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290회 생일을 기념한 퍼레이드를 보면서 과거로의 여행을 했다. 18-19 세기의 건물들이 아름답게 보전된 시가지에 따스한 햇살이 파티 분위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축제 분위기로 흥청거리며 도로변을 빼곡하게 둘러선 사람들 중에 마스크를 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나도 코로나바이러스로 힘겨웠던 지난 2년을 잊었다. 퍼레이드에는 많은 단체가 참여해서 미국 초창기 역사를 상기시켜 주고 더불어 그들이 과거는 현재로 또한 미래로 계속됨을 증언하는 것을 재미있게 따랐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해서 자유를 찾고 신생국가를 세운 혁명가들에게 부끄럽지만 현실에서는 실체를 잡기가 어렵다. 이민자들로 형성된 미국사회가 멜팅 팟으로 동화되었다가 제각기의 특성과 개성을 유지하는 과일 샐러드로 변했는데 최근에는 관점의 다른 해석으로 분열해서 혼란한 것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환경과 상황에 따라 기존의 의식이 변하면서 주장하는 자유의 진정한 한계는 어디쯤인지 가늠을 못하겠다.
독립혁명군의 복장으로 배럴이 긴 장총을 든 그룹이 바로 내가 선 사거리에서 발포했다. 쏟아져 나온 하얀 연기는 빠르게 공중에 흩어졌다.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파괴시키는 소련군들이 거리에서 난사하는 총에서도 이런 하얀 연기가 나오는지 궁금했다. 퍼레이드가 끝난 후 한 참여자를 만났다. 그가 가진 매끈한 장총을 들어보니 무척 무거웠다. 그것에 총검을 부착하니 내 키만큼 길었다. 그 총을 들고 독립전쟁을 치루었던 옛사람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싶다가 다시 내 의식은 파괴된 도시와 피난민들의 사진이 비현실적으로 가슴에 담긴 우크라이나 상황에 어지러웠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피나는 노력이 성공해서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들을 응원한다.
중심가 도로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사람 구경을 하고 강변에 가서 푸른 하늘과 강물이 주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가까이 있는 워싱턴DC 대도시 환경을 배경으로 소도시의 매력을 맘껏 자랑하는 올드타운은 부산스러움이 별로 없어서 좋다. 이웃과 어울려서 다정하게 사는 이곳은 뒷골목 조차 정겨운 곳이다. 올드타운처럼 내가 좋아서 즐겨 찾는 곳은 버지니아 북부에 있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 미들버그다. 그곳도 고풍스런 과거의 분위기로 아름다운 곳이다.
미들버그를 찾아간 날은 겨울의 입김이 싸늘해서 옷깃을 단단하게 여미고 다녔다. 방문객이 별로 없어도 거리는 썰렁하지 않고 푸근했다. 18세기에 형성된 이 마을의 중심가는 역사적인 지역으로 보전된 곳이고 그 중에 조지 워싱턴의 사촌인 Joseph Chinn이 1728년에 세운 ‘The Red Fox Inn and Tavern’은 아직도 영업을 한다.옛사람들은 사라졌어도 옛 건물들은 건재하다.
세월을 버틴 아기자기한 건물마다 나름 스토리를 가졌고 양쪽 거리에 옹기종기 둘러 선 가게들이 독특한 유럽 물품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영국의 어떤 작은 마을에 들린 착각을 준다. 시간을 잊고 느긋하게 거리를 걷다가 인상이 부드러운 노인을 만났다. 그는 퇴직하고 심심해서 가진 취미라면서 자신이 직접 만든 유리구슬 팔찌들을 보여줬다. 4살 손주에게는 붉은 여우 구슬이 끼인 하얀색 팔찌를 골라주고 나에게는 원하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낯선 사람의 훈훈한 정이 마음을 데워줬다. 가까운 와이너리에서 다른 가족들은 시음을 하는 동안 환하게 열린 넓은 언덕에서 앞서 달리는 손주를 더 이상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것이 나의 오늘이었다.
사순절에 들어서서 일까.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인식하는 하루 하루가 천천히 지나간다. 시간만 아니라 나의 움직임과 주위의 모든 일들이 느릿하게 일어나고 머리 속의 복잡한 일들도 풀어 흩어진 구름조각처럼 가볍다. 그리고 내가 사는 남부 소도시의 환경이 올드타운과 미들버그와 다르지 않은 것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