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려 호텔 마당으로 나갔다. 2월 말 주말에 플로리다 나바르비치에 가서였다. 바다로 이어진 호텔마당 끝 나무의자들 중 한 의자에 한 백인 남자가 앉아있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앉아 명상하는 남자, 옛날 석굴암에 가서 일출 때 본 부처님상이 생각 났다.
명상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다른 자리에 서서 수평선 끝 바다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뜨는 태양 앞쪽으로 황금조각 반사들이 이어진 수평선, 그 길을 따라 태양이 나에게 오는 것 같이 보였다. 지구상의 동 식물을 살리는 태양, 나도 태양 덕에 산다는 무한 감사, 이성보다 먼저 감사의 감정으로 경건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부처 상을 연상시키던 사람을 호탤 식당에서 만나 잠간 이야기했다. 그의 이름은 마이크, 그는 차분하고 건강한 백인 한의사였다. “마이크, 이 순간을 산다는 말, 그 말을 다시 한번 이야기해 주겠어?” “성불 한 부처님에게 제자들이 물었어. 부처님이 얻은 결론이 뭐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산다는 것, 과거와 미래를 콘트롤 할 수없고, 나는 오직 이 순간만 살아있다’ 라고 부처님이 대답했지.” “오직 이순간만 산다는 말이 너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이 순간만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순간이야. 이 순간을 행복으로 만들어야 해.” 그의 명상에 대해 더 듣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우리 일행 남자들 네 명은 바다 가운데로 길게 뻗은 피어에서 낚시를 했다. 피어에는 낚시하는 사람들, 가족들과 산책하는 사람들, 피어 난간에 기대어 바다나 하늘을 보는 사람들, 사진을 찍는 사람들, 늙은 사람들, 어린 애들, 주로 백인들이고 유색인종은 별로 보이지 않는데, 그들의 공통 점은 ‘나 기분 좋아요, 나 행복합니다’ 그런 표현이 말이 아니라 얼굴과 몸에서 뿜어 나왔다. 왜 그들이 행복해 보이는지 직접 몇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고기 잡혀요?” 인상 좋은 백인 부부가 피어에서 낚시대 곁에 선 내곁을 지나다 물었다.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두분 아주 행복해 보여요. 왜 지요?” “우린 미국의 북쪽 끝 매인에서 왔어요. 아직 눈이 쌓이고 추운 곳에서 여기오니, 아주 좋네요.” “여기에서 특별히 뭐가 좋아요?” “보드라운 바다 바람.”
보드랍고 따스하고 소금기 있는 바닷바람이 기분 좋다는 중년 남자는 전기 기술자로 우리가 사는 조지아에서 왔다고 했다. “여기서 계속 산다면 그래도 행복 할까요?” 내가 물었다. “여기에 내 일거리가 많다면 모를까, 그럴거 같지 않네요. 한 여름은 무더워 피서를 가야겠죠.” 플로리다에 살다가 조지아로 이사 온 몇 가정을 나도 안다.
또 다른 중년 백인 부부가 낚시대 옆에 내 곁을 지나가다 싱긋 웃으며 인사한다. “두 분 행복해 보이는데, 뭐 좋은 일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백사장 비치하며 보드라운 바닷바람하며, 따갑지 않은 태양하며, 아름다운 바다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얼마나 아름다워요!” “목사님이세요?” “아니요. 교인이지요.” “이곳 플로리다 사세요?” “우린 인디아나 에서 왔어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 속에 살면서, 왜 평소에 우린 잊고 살가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있고, 이렇게 여행을 와서야 다시 보는 거요.” 조금 후에 그들의 아들 세 명이 그들에게 왔다.
해변에서 만난 행복해 보이는 몇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이유를 들어보니 나도 동감한다: 보드랍고 따스한 바다바람이 내 얼굴과 팔뚝을 어루만지는 기분, 흰 모래밭과 해변을 맨발로 걸을 때 감촉,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수평선, 같이 여행온 친구들, 틀어박힌 일상의 테두리 밖으로 나와 더 넓고 아름다운 창조주의 질서속에 나의 일상도 작은 한 부분이라고 느껴지는 안심, 그래서 우린 행복해 보이는 것 같다. 이런 여행이라도 와야 익숙한 틀을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일상도 큰 질서 속에 한 부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걸까? 그래서 우리가 조금 더 행복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