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부터 몽고메리에 사는 여인들 몇과 정기적으로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수다 모임을 가졌다. 코비드 팬데믹을 견딘 서로의 근황을 나누다가 좀 더 의미 있는 만남을 가지자고 매주 주제를 선택하고 그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다. 세상 돌아가는 물레바퀴에 함께 돌며 서로의 관점을 자유롭게 나누니 각자의 체험이 플러스 였다.
최근에 수다 모임은 진전했다. 전에 뉴햄프셔주에 사는 지인이 글동무들을 가진 것을 자랑하며 나를 약올렸었다. 드디어 나도 서로 신선한 충동을 주며 좋은 글 쓰도록 격려하는 글동무들을 가졌다. 전설적인 영웅 킹 아서의 둥근 테이블을 닮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 무슨 제목이 좋을까? 하니 요세피나씨가 우연이 아닌 우리의 만남에 떠오른 ‘인연’을 제안했다. 모두 동의하고 20분 동안 흩어져서 ‘인연’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다시 둥근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글을 읽었다. 멤버들의 알찬 글에 “와우” 감탄이 연거푸 나왔고 내 허술한 글이 부끄러웠다. 첫 시도에서 대단한 저력들을 발견한 기쁨이 커서 여기 자랑한다.
정옥씨의 글이다. ‘인연이라는 주제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아니 이름이 ‘아사코’이다. 하얀 얼굴에 맑은 눈을 가진 소녀, 그러나 만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거라는 세번째 만남에서 백합같이 시들어 가고 있던 아사코… 피천득 선생님이 아사코를 두번째 만난 것은 아사코가 아마도 스물 한 두 살 쯤이었을 것이다. 함께 산보를 하다가 캠퍼스를 들러 찾아온, 그날 잊어 버렸던 연두색 우산… 그후 피천득 선생님은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아사코의 우산을 연상하고 ‘셀부르의 우산’ 이라는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 우산 때문인 것 같다 하신다. 사람은 어디에서나 만나고 헤어지지만, 가끔 어떤 인연은 ‘아사코의 우산’ 같이 우연한 사물 때문에 연상되고 그리워지기도 한다. 초등학교 때 어떤 친구의 예쁜 구두처럼… 지금 둥근 원탁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언젠가 이 원탁이 내게 ‘아사코의 우산’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세번 네번 만나도 만나서 참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인연이 되길…’
요세피나씨의 글이다. ‘나무를 좋아한다. 나무 그리기를 좋아한다. 어떤 모양이든 다른 그 모양들 자체가 참 흥미롭다. 그 나무들을 보면서 난 사람들을 생각한다. 무성한 나무, 앙상한 나무, 새순이 돋아나는 작은 아기나무… 나는 어떤 나무일까. 나무를 보면 늘 떠오르는게 사람과의 인연이다. 내가 어느 곳에 뿌려져서 어떤 싹으로 자라 어떻게 뿌리내리며 살고 있는지 어떤 무리속에 숲을 이루며 살고 있는지 아님 덩그러니 빈 들판에 홀로 선 나무로 살고 있는지를- 뿌리 깊은 인연으로 살고픈 바램이 참 컷던 것 같고 그래서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온 것 같다. 지금 난 무성한 잎으로 숱한 인연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오늘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아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 – 그 나이가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한결같은 인연으로- 깊은 뿌리로 자리잡고 흔들리지 않는 고목이 되어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그 흙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마주하는 인연 몇이라도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그 숱한 인연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오늘도 새 날, 새로운 공부를 하듯이 배우고 자라며 깊어지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지씨의 글이다. ‘희끗 희끗 보일까/ 두려워 고개를/ 숙여보지만/ 한자락 바람이 타고/ 내려와 속삭이는/ 하얀 봄맞이 배꽃/ 그 자리에서 수세월/ 기다렸지만/ 이제야 알아 보는구나/ 한줄 두줄 새겨지는/ 시간 속에/ 너와의 만남이/ 준비된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
내가 쓴 글이다. ‘길게 늘어진 고무줄처럼/ 휘어져 흔들리는 버드나무 줄기처럼/ 그렇게 부드럽다가/ 일정한 거리를 고집하는/ 철도길로 자리를 지키는/ 나와 너의 만남/ 세상살이 덩쿨되어 기대어/ 봄 여름 가을 겨울 보낸다/ 거울 앞에 서니/ 다가오는 너의 손길이/ 내 주름살을 가려준다/ 미소를 띄게 한다.’
봄의 시작에 글동무로 모인 우리의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지 흥분된다. 어쩌면 ‘몽고메리 여성문학회’가 태동한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