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 상설 전시관 ‘규모 압도’ 주변 숲과 정원 산책도 좋아
1920년대 저택 스완하우스는 영화 ‘헝거게임’ 촬영지로 유명
#.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다시 봤다. LA를 오가는 델타항공 비행기에서다. 오래 전 두세 번 봤던 영화였지만 요즘 조지아에 살아서인지 영화가 완전히 새로웠다.
마음에 담고도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그녀의 절절한 연심(戀心)과 분투가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남북전쟁 전후의 전쟁 상황과 남부 인물들의 캐릭터가 너무나 생생했다. 폐허가 된 애틀랜타, 불탄 집과 황폐화한 농장들, 하루 아침에 구걸 신세로 전락한 남부 사람들의 눈물겨운 사투가 다큐멘터리처럼 녹아 있었다.
영화는 1936년 출간된 마가렛 미첼(1900~1949)의 소설이 원작이다. 미첼은 이 한 편의 소설로 미국의 대표적 작가가 되었다. 애틀랜타에 살면서 그녀가 살던 집은 한 번 가보는 것이 도리이겠다 싶어 검색을 하다가 뜻밖에 오늘 소개하려는 애틀랜타 히스토리센터를 알게 됐다.
마가렛 미첼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1936년도 초판본. 생활 문화 전시관 ‘게더라운드’에 있다.
조지아를 비롯해 남부를 다녀보면 어딜 가나 남북전쟁 흔적들이 있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애지중지 보호하고 기린다. 그런 전쟁터와 파괴된 건물, 기념관들을 가 보면 마치 ‘잊지 말자, 남북전쟁’이라고 다짐하는 것만 같다. 남부인의 관점에서 기술된 미국 역사를 읽어 보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남북전쟁을 보는 시각이 교과서에서 배웠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말이다.
남부는 스스로 미국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신세계 미국 정신의 진정한 구현자라는 자부심도 강했다. 고향과 전통을 지키려는 정신과 사기 또한 북부보다 현저히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도 모르는 상것’이라며 얕잡아봤던 북부에 패배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전쟁에는 졌지만 그것이 순전히 물질적, 군사적 열세 때문이었지 도덕이나 정신의 문제는 아니었다고까지 생각했다.
전쟁의 상처는 북부 ‘양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바뀌어 대를 이어 뇌리에 각인되었다. 연방 정부의 포용정책으로 남부는 다시 재건되었지만 마음속 응어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도 도시 외곽으로 가면 심심치 않게 당시 남부연합 깃발을 볼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애틀랜타 역사센터. 남북전쟁 기념관을 비롯해 9개의 상설전시실을 갖춘 미국 최대 박물관이다.
#. 애틀랜타는 남북전쟁의 최대 격전지이자 피해지였다. 패배의 상흔이 너무나 컸다. 지금의 애틀랜타는 그런 아픔 위에 다시 세워진 기적의 도시다. 그 과정을 오롯이 모아놓은 곳이 바로 애틀랜타 히스토리 센터(Atlanta History Center)다.
애틀랜타 최고 부촌이라는 벅헤드에 자리 잡은 이곳은 미국 최대의 역사박물관이자 연구소다. 전체 부지가 33에이커에 달한다. 거대한 전시관은 물론이고 1920년대 저택 스완하우스(Swan House)를 비롯해 농장과 캐빈 등 남부인들의 옛 생활 공간까지 센터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주제별로 가꿔놓은 정원도 훌륭하다.(마가렛 미첼 하우스도 같은 역사센터 관할이지만 위치는 애틀랜타 다운타운에 따로 있다. 주소: 979 Crescent Ave NE, Atlanta, GA 30309)
땅값 비싼 벅헤드 중심에 이 정도 넓은 공간과 대규모 시설을 갖추기기 쉽지 않았을 테지만 오랜 세월 꾸준히 기부 받고 기증 받고 구입도 한 결과였다. 한국의 독립기념관 건립 당시 전 국민이 십시일반 성금을 보냈던 것처럼 과거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애틀랜타 사람들의 ‘역사 기억’ 의지였던 것이다.
역사센터의 뿌리는 1926년 발족된 애틀랜타 역사협회(Atlanta Historical Society)였다. 남북전쟁 관련 연구 및 자료 수집을 위해 지역 유지들끼리 시작한 소규모 모임이었다.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1990년부터다.
전시관은 1993년 문을 열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확장해 지금은 9개의 상설 전시관과 주제별 임시 전시관을 갖춘 종합 박물관이 되었다. 역사센터 내 키난연구소(Kenan Research Center)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남북전쟁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연구소로 꼽힌다. 주요 상설 전시관은 다음과 같다.
▶올림픽 기념관 ‘앤틀랜타 1996’ : 1996년 올림픽 게임에 관한 종합 기록관이다. 애틀랜타 시민 생활에 미친 영향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원형 파노라마 극장 ‘사이클로라마(Cyclorama)’ : 남북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애틀랜타 전투 상황을 대형 스크린으로 재현한다.
▶철도 전시실 ‘로코모션(Locomotion)’ : 애틀랜타가 동남부 교통의 허브이자 상업중심지로 성장하는데 기여한 철도의 역할을 보여준다.
▶남북전쟁 기념관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미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남북전쟁에 관한 종합 기록관이다. 당시의 사진, 전쟁 무기, 제복 등 1400여점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남북전쟁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은 전시실 ‘터닝포인트’ 입구
▶생활 문화 전시관 ‘개더라운드(Gatheround)’ : 현재의 애틀랜타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는지, 애틀랜타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이민사회의 성장도 엿볼 수 있다.
▶민속 박물관 ‘셰이핑 트러디션(Shaping Traditions)’ : 의복, 음식, 노래 등 미국 남부의 다양한 민속 예술이 어떻게 전통으로 형성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원주민 생활관 ‘네이티브 랜드(Native Lands)’ : 크리크족, 체로키 족 등 조지아를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들에 관해 간략하게 전시하고 있다.
▶바비 존스 기념관 ‘페어 플레이(Fair Play)’ : 1930년대 세계 4대 메이저 대회를 석권한 애틀랜타 출신의 골프 영웅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골프 영웅 바비 존스 기념관.
나는 두 시간 여에 걸쳐 구석구석 둘러봤다. 한 공간에 이렇게나 많은 전시관을 갖춰놓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느 전시실이든 대충 보고 지나가기엔 아까운 내용들이라는 것은 더 놀라웠다. 웬만한 산행 한 번 하는 것처럼 다리는 아팠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올림픽 기념관, 남북전쟁 기념관, 생활 문화 전시관은 더 흥미롭고 유익했다. 한국 관련 기록이나 애틀랜타 한인사회 초기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는 사진이나 전시품들을 만날 때는 더욱 반가웠다.
애틀랜타 역사센터에 전시돼 있는 1990년대 도라빌 한인타운 사진. 한글 간판들이 정겹다.
#. 뮤지엄 외에 꼭 들러야 할 곳이 ‘스완하우스’와 주변 정원이다. 국가 사적지로 보호되고 있는 이곳은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헝거게임’ 촬영 세트장으로 더욱 유명해 진 곳이다.
애틀랜타 역사센터에서 스완하우스로 이어지는 다리.
1928년에 완공된 이 집은 에드워드 인만(Edward Inman, 1881~1931)이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인만은 면화 산업으로 큰돈을 번 애틀랜타 유지였다. 면화 외에 철도, 부동산, 철강 사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남북전쟁 후 파괴된 애틀랜타 도시 재건을 위해 크게 기여했다. 애틀랜타 시의원이자 풀턴카운티 커미셔너로 지역 정치에도 관여했다. 그의 부인은 여성 참정권 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여성운동가로 스완하우스에는 그녀의 이런 노력과 활동 상황이 전시되어 있다.
계단식 잔디 위, 숲속에 우뚝 솟아 있는 스완하우스. 야외 결혼식장으로도 애용된다.
스완하우스 설계자는 필립 트라멜 슈츠라는 유명한 건축가다. 백조를 모티프로 건축된 집이라 해서 스완하우스(Swan House)라는 이름이 붙었다. 백조는 인만의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새였다. 인만 사후 오랫동안 이집을 지켰던 그의 아내는 백조 이미지의 우아한 중앙 계단을 보호하기 위해 집안 식구들에게 이 계단 대신 뒤쪽 계단만 이용하게 했다고 한다. 이 집은 인만 부인이 죽은 후 1966년 이 집을 애틀랜타 역사협회에 팔렸다. 협회는 복원 작업을 마친 후 1967년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역사센터의 일부가 된 것은 1993년부터다.
스완하우스 내 회전 계단. 백조의 우아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집은 지하실이 있고 앞에서 보면 3층, 뒤로 돌아가서 보면 2층 규모의 대리석 건물이다. 1층과 지하에는 이 집의 설계자였던 필립 슈츠(Philip Trammell Shutze)의 생활 수집품을 모아놓은 전시실이다. 중국산 수입 가구, 양탄자, 그림, 도자기 등이 볼 만하다. 지하 주방은 물론 1층의 중후한 서재, 2층의 화려한 생활공간은 1920년대 남부 부유층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3층은 소박한 하인들 숙소가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고 인만 아내의 여성참정권 운동 기념관도 따로 꾸며져 있다. 전체적으로는 애쉬빌에 있는 세계 최대 민간 저택 빌트모어 하우스의 10분의 1 축소판 같다는 느낌이었다.
집 주변으로 아기자기한 조경을 따라 여러 갈래 산책로가 나 있어서 가볍게 걷기에 더없이 좋다. 옛날 오두막집도 만나고 오래된 농장도 있다. 역사박물관과 스완하우스 사이에 있는 계곡 정원도 꼭 걸어봐야 한다.
스완하우스 인근 숲속 벤치. 인적이 드물어 조용히 사색에 잠길 수 있다.
나는 지난 늦가을에 들렀는데 짙어가는 단풍이 기가 막혔다. 필경 꽃 피는 봄날도 좋을 것이다. 한국이나 타주에서 손님이 오면 스톤마운틴만 데려가지 말고 이런 곳도 구경시켜 준다면 좋아할 것 같다.
스완하우스 뒤편 숲 속에 있는 오두막집. 1800년대 남부의 전형적인 캐빈이다.
애틀랜타 역사센터 스완하우스 담당 직원(오른쪽). 20년 넘게 이곳에서 일했다며 묻지 않는 것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 메모 : 입장료 $23.41, 65세 이상은 $19.41로 뮤지엄, 연구소, 스완하우스, 가든 등 모든 공간을 다 둘러 볼 수 있다. 이것저것 음식 먹을 수 있는 카페도 분위기가 괜찮다. ▶웹사이트 www.atlantahistorycenter.com ▶주소 : 130 W Paces Ferry Rd NW, Atlanta, GA 30305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 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