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장문황후는 청나라 2대 황제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의 비(妃)이며, 3대 순치제의 모후다. 그녀는 청나라 초기의 네 왕조를 경험했고, 그 가운데 두 명의 어린 황제를 보필했다. 대청제국 초기의 치열하고 참혹한 권력투쟁 속에서 효장문황후는 중대한 고비마다 기민하고 과감한 결단으로 제국을 단결과 발전의 길로 이끌었다. 만주족 최고의 미녀’란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여인이자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였던 효장문황후는 제국의 권력이 빛바랜 순간 자신만의 위엄으로 제국을 지켜낸 수호자였다. 효장문황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간 여인이다. 하늘은 그녀에게 봉건시대의 여인답지 않은 재능과 포부를 안겨줬다. 그리고 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운명도 함께 부여했다. 이토록 영웅적인 인생의 대가로 그녀는 여성으로서 정조를 버렸다는 후손들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녀의 든든한 보살핌을 받은 황제들은 제위를 굳건히 한 후 나라의 강토를 만주에서 중국 대륙, 서역으로 넓혀나갔다. 효장의 남편 홍타이지는 우리 한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인물이다. 1636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와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 태종이다. 다음해인 1637년, 효장은 아들 복림을 출산했다. 그러나 1643년, 홍타이지가 뇌출혈로 급서했다. 갑작스런 죽음이어서 후사에 대한 한마디 언질도 남기지 못했다. 효장과 복림의 인생은 이때부터 급격히 물줄기를 틀게 된다. 후계를 놓고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황숙 도르곤과 홍타이지의 장자 호격이 정면 대립했다. 다른 황숙 황자들까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들은 모두 최정예 팔기군을 나눠 거느리고 있다.
이 때, 만주족 특유의 의정제도가 놀라운 정치적 해결을 이끌어냈다. 의정회의에서 결정된 후계 황제는 뜻밖에도 효장의 아들 복림이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이 된 복림이다. 어린 꼬마가 놀랍도록 총명해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다. 도르곤도, 호격도 상대가 즉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도출된 고육책이었다. 청나라 황실은 17년 전에도 비슷한 파동을 겪었다. 홍타이지가 즉위할 때다. 개국 황제인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전투 도중 부상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유언을 문서로 남기지 못해 병석을 지킨 아들 홍타이지에게 몇 마디만을 전했다고 한다. 누르하치가 죽은 후, 홍타이지가 전한 유언은 모든 사람의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오랍나랍씨를 순장하라.’
누르하치가 가장 아끼던 여인이다. 도르곤의 생모이기도 하다. 이 여인을 너무나 사랑해 그녀 소생 세 아들도 누르하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12황자 아지거, 14황자 도르곤, 15황자 도도는 한 순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 한때는 누르하치의 후계자가 셋 가운데 하나일 것이란 소문도 무성했다. 뜻밖에도 새 황제가 된 홍타이지가 누르하치 못지않게 도르곤을 아꼈다. 차곡차곡 군 경력을 쌓아 도르곤이 아시아 최고의 명장으로 성장하도록 온갖 후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홍타이지 없는 세상에서 도르곤은 최고 실력자가 됐다. 그의 눈에 홍타이지의 여인 효장이 들어왔다. 미모도 출중하지만 정국을 보는 데 있어서 비범한 재능을 가진 매우 걸출한 여인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여인 효장을 차지했다.
어머니의 수치가 복림의 원한으로 이어진 양상이었다. 도르곤은 사후에 성종 의황제로까지 추존됐지만 곧 이은 격하 움직임으로 시신을 훼손하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여인의 자존심을 내던지고 황제로 만든 아들이 순치제 복림이다. 순치제는 어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외면하듯 스물세 살 나이에 세상을 버린다. 이제 혼신을 기울여 손자 현엽(강희제)을 지켜야 했다. 현엽을 둘러싼 조정에는 호랑이 같은 권신들이 보정대신의 탈을 쓰고 제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4대 황제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순탄한 적 없는 권력이양 과정을 겪었다. 만약 효장이 강희27년까지 76세의 장수를 누리지 않았다면 중국 역사상 최고의 60년 태평성대를 이끈 강희제 치세는 일찌감치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미약했던 황권을 굳건히 하고 오삼계 등 삼번의 난도 평정한 강희제가 30대 장년으로 성장한 어느 날 효장은 유언을 남겼다.
“마땅히 태종 폐하 계신 곳에 가야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소란 떨기 미안하구나. 우리 손자 있을 곳에 나도 함께 묻어주면 좋겠다.” 너무 멀어서,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서 남편 찾아가기 미안하다는 것만이 그녀의 본심은 아니었을 듯하다.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를 두고 떠나버린 아들에 대한 서운함, 그리고 살아온 날들의 허탈함에 그저 번거로움을 떨쳐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효장문황후는 평생 3대의 황제를 지켰으며 특히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온 여인으로서 후세인들은 그녀를 ‘청나라의 국모’라 부르기도 한다.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묵묵히 무명공신의 역할을 담당해 역사적 위인으로 불리는 그녀, 오늘에도 중국인들은 그녀의 선량함과 영명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요즘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문재인 대통령 부인의 화려한 옷과 장신구 이야기로 시끄럽다. 대통령 부인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는 못할망정 ‘옷사치’ 때문에 ‘김멜다’라고 조롱 받는 모습이 민망하다. 그녀의 옷값 논란에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은 “영부인의 옷차림도 외교이고 국격”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소위 ‘패션 외교’는 여성이 외모로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여성의 본분은 일하는 남편의 곁을 꽃처럼 장식하는 것인가. 남편의 지위로 얻은 재물로 치장하는 게 무슨 본보기라도 되나. 국격을 옷으로 높이나. 너무도 비현실적인 일화들이 전해질 때마다 청와대 저 깊은 속에선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의아할 뿐이다. 왜 청와대를 탈출하려고 하는지, 문재인의 청와대가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