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란타에 있는 딸네 집에서 앨라배마에 있는 우리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천둥과 번개에 이은 폭우가 줄곧 함께 했다. 전 같으면 이런 날씨에 운전하는 것을 피했을 것인데 이번은 아니었다. 딸과 사위가 기상청의 폭풍우 일기예보가 있으니 오늘 떠나지 말라고 말려도 가방을 차에 실었다. 일단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무섭게 쏟아지는 비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 계속됐다.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고 천천히 조심해서 운전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암울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깜빡이 등을 키고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는 차들이 어쩌면 우리 부부의 미래 같아서 마음이 심란했다.
지난달 워싱턴DC에 있는 큰딸네에 머물면서 가졌던 불편함이 이번에 작은딸네에 머물면서 다시 느껴졌다. 전에는 딸들의 집을 들락이며 그들의 생활속에 자유롭게 섞였는데 이제는 아니다. 간혹 남의 집을 방문한 기분이 들었다. 전처럼 딸네집 이것 저것 정리해주며 뭔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적에는 내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성숙한 어른으로 자신들의 생활을 야무지게 꾸려가는 딸들에게 우리가 도울 것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딸들에게 의지하는 입장이 되니 부담스러웠다. 누군가에게도 폐가 되지 않으려고 평생 노력했는데 내가 낳고 키운 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싫었다.
예전에 친정어머니가 내 집에 사실 적에 느꼈을 복잡하고 미묘했던 감정을 올해 내가 잠깐 맛보았던 것이리라. 내가 그랬듯이 지금 내 딸들도 전혀 내 마음을 읽지 않는다. 자신의 가정과 직장에 바빠서 나이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 부모의 노후대책을 우선 걱정했다. 늙은 부모는 자식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보다 걱정거리이다. 근래에 딸들과 나눈 대화는 나에게 삶의 순환과 세월의 흐름을 따갑게 일깨워준다.
특히 올 봄에 남편이 사이버 사기를 당한 일이 있어서 였는지 딸네들 방문 중에 우리 부부의 노후 문제가 노골적으로 거론됐다. 큰딸은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변화와 메디컬 이슈 등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결정을 물었다. 우리의 뜻을 따라서 대처하겠다고 했다. 무심히 스쳐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우리가 죽으면 “화장을 원하는 지 매장을 원하는 지” 당돌한 질문을 해서 당황시키더니 이번에는 한발짝 성큼 더 다가왔다. 사후의 처리뿐 아니라 지금부터의 전반 문제를 물었다. 딸의 질문을 담담하게 듣고 온 후에 우리 부부는 본격적인 행동을 취했다. 요즘 변호사를 만나 ‘생전 신탁’을 작성한다.
그런데 이번에 작은 딸이 불쑥 “훗날 엄마가 혼자되면 우리집에 와서 함께 살자” 해서 “노. 나는 혼자가 되어도 독립적인 생활을 할거야” 단번에 거절했다. 가까이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편은 어린 손주와 노느라 우리의 대화를 듣지 않았다. 만약에 그가 들었다면 마음이 상했을 질문이었다. “그럼 큰 집에 혼자 살거야?” 묻길래 “집 관리 힘들면 작은 가든홈으로 옮기지” 했다. 딸은 끈질기게 나를 궁지에 몰았다. “만약에 엄마가 운전을 할 수 없게 되면? 몸이 불편하면? 그때는 나와 같이 살자” “글쎄, 아직 그것까지는 생각 안해.” 늙어도 당당하게 살고 싶다.
두 딸네에 머물면서 나눈 대화들이 나를 우울하게 해서 세차게 내리는 비로 시야가 흐려도 불안하지 않았다. 인생살이 힘든 것에 견주면 이런 날씨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겨졌다. 나는 손주들과 공을 차고 요가도 함께 하는 재미있는 할머니라 생각했는데 딸들에게는 훗날 돌봐야 하는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초조함이 내 마음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같은 나라에 살면서 지역 환경과 분위기가 달라서 였는지 딸네들 집에 머물다 온 것이 마치 남의 나라를 방문하고 온 것같이 여겨진다. 재롱둥이 손주들이 없었다면 무척 건조했을 방문이었다.
솔직히 나 사는 곳, 나한테 익숙한 환경에 머물면 마음이 편안해서 나쁜 날씨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가벼워서 좋다. 그리고 ‘평온을 구하는 기도’ 가 입안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주여,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