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해가 이미 저물었으되 오히려 노을이 아름답고, 한해가 곧 저물려 해도 오히려 귤 향기가 더욱 꽃답다. 한 생애의 말로인 노년은 군자로서 마땅히 백배로 정신을 가다듬을 때이다.”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세 달이 모이면 한 계절이 된다. 사계절이 흐르면 일 년이 되고, 그 일 년들이 모여 일생이 된다. 일 년이 사계절이듯, 하루도 사계절이고 일생도 사계절이다. 생로병사가 곧 춘하추동 아닌가.
산다는 건 이 리듬을 따라 흘러가는 일이다. 청년은 청년답게, 노년은 노년답게. 이것이 인생이고 또 자연이다. 어떻게 하면 이 자연스러운 리듬을 구현해낼 것인가. 인류는 오랫동안 이 과제를 탐구해왔다.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는 그런 지혜의 산물이다. 키케로는 말한다. “인생과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한번만 가게 되어 있네. 그리고 인생의 매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
이렇게 정리하면 노년은 결코 하위개념이 아니다. 청춘이 아무리 아름답고 힘차다 한들 거기에서 원숙함은 불가능하다. 원숙함이란 능력이나 재능 따위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흘러간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노년을 두려워하거나 경멸한다. 노년을 청년의 결핍으로 여기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쾌락을 즐기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에 대한 키케로의 태도는 아주 단호하다. “세월이 정말로 젊은 시절의 가장 위험한 약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준다면, 그것은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얼마나 멋진 선물인가!”
쾌락은 인생의 특권이 아니라 약점이란다. 더 나아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역병 가운데 쾌락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다.” 오호, 쾌락을 역병에 비유하다니, 그야말로 통념의 전복이다. 그렇다면 금욕을 강변하는 것인가. 아니다. 금욕은 어떤 점에서 쾌락의 또 다른 짝이다. 하여 금욕의 기준이 엄격해질수록 쾌락에의 유혹도 커지는 법이다. 쾌락도 금욕도 아니라면 대체 어떤 길이 있을까. 오직 스스로 열어가야 한다. 그 스승은 자연이다.
이미 연로한 소포클레스에게 누군가 물었다. 아직도 성적 접촉을 즐기느냐고. 그에 대한 소포클레스의 응답. “아이고 맙소사! 사납고 잔인한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이제 나는 막 거기서 빠져나왔소이다.”
그렇다. 쾌락은 거칠고 난폭하다. 거기에 휘둘리면 노예처럼 끌려 다녀야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노년이 되면 이제 그 난폭한 주인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 욕구가 자연스럽게 잦아드니 결핍 또한 없다는 것. 그러므로 노년이란 ‘마음이 성욕과 야망 등 온갖 전투를 다 치르고 난 뒤 자신과 더불어 화해하는 시간’이다.
동안(童顔)열풍과 성형중독이 보여주듯이, 우리 시대는 오직 젊음에 대한 열광 혹은 늙음에 대한 경멸이 난무한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은 무려 400살이나 먹었음에도 절대동안이다. 그리고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직 첫사랑의 추억 속에서 맴돈다. 당연히 노년의 지혜 같은 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노년에는 체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노년의 체력 저하는 자연현상으로 슬퍼할 일이 못된다. 오히려 노년기에는 마음과 정신의 연마에 더욱 힘써야 한다. 육체와 달리 정신은 나이가 들어도 갈고 닦을수록 고양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년이 되면 일을 못한다고? 큰일은 육체의 힘이나 기민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려와 판단력으로 하는 것이지.”
노년이 죽음으로부터 멀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더 멀리 있지도 않다. 젊었다 해도 오늘 당장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인의 죽음은 익은 과일이 땅에 떨어지듯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젊은이의 죽음은 익지 않은 과일을 강제로 따는 것과 같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농부들이 봄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 이상 죽음을 슬퍼할 이유는 없다. 자연에 의해 이루어진 모든 것은 좋은 것이다. 죽는 것만큼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키케로가 말하는 노년의 삶과 죽음은 자연의 섭리다. 노년은 쇠락과 체념의 시기가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태어난 것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면 인생은 충분하다. 그는 혼란이 난무하고 혼탁한 속세를 떠나 신성한 영혼들이 모여 있는 하늘로 떠나는 그날을 영광스러운 날이라고 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이승에 잠깐 소풍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일체다. 그래서 죽은 후에도 영원불멸이 이어지기 때문에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는 순간이 두려운가. 우리의 삶은 영원의 한 순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그러면 당신 이전에도 당신 이후에도 영원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거대한 심연 사이에서 당신은 사흘을 살든 3세기를 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키케로는 공화정 시대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인이었으므로 그의 말 속에는 로마의 국가철학이었던 스토아 사상이 잘 녹아 있다. 스토아철학은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 남성적이고 선이 굵은 승자의 철학이다.
키케로는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를 살았다. 카이사르는 키케로를 자기편으로 삼고자 했지만 키케로는 전제 군주가 되려는 카이사르의 야심에 반발했다.
키케로는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안토니우스 역시 전제 정치를 펼치며 반대파를 처단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결국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 옳은 것과 안전한 것 사이에서 옳은 것을 택했고, 그 대가로 죽음을 당했다. 키케로는 결코 ‘찌질’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