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기반 노예 폐지론에 남부 위기감
정치적 입장 차이로도 끊임없이 대립
#. 남과 북의 문화 차이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내전(Civil War)이었다. 1861년부터 5년간 계속되면서 당시 백인 인구 6명당 1명꼴인 300만 명 이상이 참전했고 그중 3분의 1이 생명을 잃었다. 신대륙에서 새 나라를 세운 지100년도 안 됐는데 왜 이토록 처절한 동족상잔의 살육이 벌어졌을까.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노예제도를 둘러싼 갈등, 남북의 경제적 불균형, 각 주의 정치적 이해타산 등이 지적되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이 모든 것들에서 발원된 남부와 북부 간의 불신과 반목, 증오에 기인했다.
남부와 북부는 독립 이전 식민지 시절부터 사실상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이데올로기로 분리되어 있었다. 영국에서 이주해 왔지만, 출신 지역부터 서로 달랐다. 이들은 신대륙에 와서도 자신들의 풍속, 관습, 문화를 그대로 유지했고 영국 내에서의 역사적 갈등과 원한도 계속 이어받고 있었다.
독립전쟁 중에도 남부와 북부의 입장은 달랐다. 남부 식민지들은 여전히 별개의 국가처럼 자치권을 행사했다. 전쟁이 끝나고 연방정부가 출범했지만, 남부 주들은 자신들의 자치권이 침해받기를 원치 않았다. 이는 첨예한 정치적 입장 차이로 드러났다. 북부는 연방주의, 남부는 분리주의를 지지했다. 하지만 미국 정치는 남부의 입장과는 반대로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해지는 쪽으로 흘러갔다. 남부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배경도 판이했다. 북부에선 산업화에 따라 기계의 발명과 제조업이 활성화되고 있었지만 남부에선 목화 재배의 성공과 함께 노예 거래가 일반화되었다. 북부는 도시화 산업화를 이루며 상공업의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있었지만 남부는 흑인 노예 노동을 바탕에 둔 특유의 귀족문화가 가속화되었다. 전통적인 농업 경제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담배, 목화 재배 등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던 남부에서 흑인 노예는 절대적이었다. 반면 북부는 비숙련 노예가 별로 필요 없었다. 결국 매사추세츠 주부터 노예제도를 금지했고 다른 북부 여러 주도 뒤따랐다. 이 또한 남부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 시한폭탄 노예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1776년 7월 4일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문이다. 하지만 여기 ‘모든 사람’에 흑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독립을 위해 싸웠던 많은 지도자 대부분이 흑인을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심지어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토머스 제퍼슨 등 대통령들조차도 링컨 대통령 이전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노예를 거느렸다.
미국에 흑인 노예가 처음 수입된 것은 1619년이었다. 최초의 식민지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네덜란드 노예선 한 척이 도착해 19명의 흑인을 팔아넘겼다. 이후 17세기 말까지 2만 8000명의 흑인이 미국에 들어왔다. 18세기 들어 남부에 플랜테이션 농업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흑인 노예는 더 빠르게 증가했다.
1760년 미국 흑인은 25만 명에 달했다. 1790년엔 70만 명, 그리고 1850년엔 400만 명으로 늘었다. 당시 전체 미국 인구는 약 2300만 명이었다. 17%가 흑인이었다. (지금 미국의 흑인 비중은 2010년 센서스에 따르면 12.6%다) 노예의 몸값도 계속 올라갔다. 1790년 노예 한 명 몸값은 300달러였다. 60년 뒤인 1850년엔 2,000달러로 뛰었다.
흑인 노예들은 노예 사냥꾼과 노예 무역상들에 의해 아프리카로부터 끌려왔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노예주 마음대로 언제든지 사고팔거나 부릴 수 있었다. 노예도 사람이라는 자각이 확산되면서 건국 초기부터 노예 문제는 격론을 불러왔다. 1808년엔 노예수입금지법이 발효됐다. 그렇지만 노예의 불법 거래는 계속됐다. 정치권도 노예제도를 묵인하거나 방관했다. 아니 외면했다. 노예제도는 점점 미국의 시한폭탄이 되어 갔다.
1831년 버지니아의 흑인 노예 냇 터너(Nat Turner, 1800~1831)가 일으킨 반란은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50명의 백인이 피살됐다. 터너는 잡혀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노예제 반대 목소리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북부 여러 주에서부터 노예제가 금지됐다. 노예폐지협회 같은 단체가 활발히 움직였다. 남부의 노예들을 북부 자유주로 도주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도 생겼다. 실제 철도가 아니라 도망친 노예들을 북부로 피신시킬 목적으로 만든 전국적인 비밀조직이었다. 이들은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1822~1913)같은 사람의 활약에 힘입어 수천 명의 남부 흑인들을 북부 자유주로 탈출시켰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실어 나른 노예선 선장은 자기 일에 혐오를 느껴 뒤늦게 회심하고 종교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유명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작곡한 존 뉴턴(John Newton)이그런 사람이다.
흑인 노예를 아프리카로 돌려보내자는 운동도 펼쳐졌다. 이로 인해 수만 명의 흑인 노예가 다시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1847년 건국된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공화국은 그런 흑인들이 세운 나라였다.
흑인 노예의 참상을 고발한 책도 나왔다. 헤리엇비처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의 ‘엉클 톰스캐빈(Uncle Tom’s Cabin)’은 1852년 출간 후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독립 전쟁 직전 토머스 페인의 ‘상식’이 미국 독립의 열기를 확산시켰다면 스토우 부인의 ‘엉클 톰스캐빈’은 노예해방 운동에 확실한 불을 지폈다. 이제 노예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정치권 최대 현안이 됐다.
평화 정의 기념관에 있는 폭력과 구타로 희생된 흑인 노예를 위한 추모공간. 천장에 걸린 관 모양의 조형물에는 남부 지역의 주요 카운티별로 희생된 흑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전쟁으로 가는 길
19세기 초 연방은 노예를 인정하는 노예주와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가 11대 11로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서부 개척 및 영토 확장으로 새로운 주들이 연방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자 남부는 노예제를 받아들이는 주가 확대되기를 원했다. 북부 주들은 노예를 인정하는 주가 늘어나 연방의회의 주도권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1819년 미주리주가 노예주로 연방 가입 신청을 하면서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남부와 북부는 격렬한 논쟁 끝에 절충안을 택했다. 미주리주는 노예주로 하되 마침 매사추세츠에서 분리한 메인주를 자유주로 연방에 편입시킨다는 것이었다. 또 향후 새로운 주가 연방에 가입할 때는 북위 36도 30분을 경계로 그 이남은 노예주, 그 이북은 자유주로 하기로 했다. 유명한 1820년 미주리 협정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1849년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남부와 북부는 격론 끝에 새로 연방 가입 주의 노예 허용 여부는 주민 의사에 맡기기로 타협했다. 말은 타협이어지만남부엔 불리한 결정이었다. 이미 노예제는 반시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연방 유지가 불투명해질 가능성이 커졌다. 남부를 달래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 1850년 다시 도망노예환송법(Fugitive Slave Act)이 제정됐다. 다른 주로 도망간 노예는 붙잡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법이었다. 거기다 도망친 노예를 도와준 사람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1857년 연방대법원의 드레드 스콧(Dred Scott, 1795~1858)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대립에 기름을 끼얹었다. 남부에서 태어난 흑인 노예 드레드 스콧은 주인을 따라 북부로 이사해 자유의 몸이 됐다가 주인이 죽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콧은 북부에서 사는 동안 자신의 노예 신분은 무효가 됐기 때문에 남부에서도 노예가 아님을 인정해 달라고 소송을 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미주리협정은 백인들의 사유재산권(=노예)을 침해하고 있으므로 위헌”이라며 스콧은 자유인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여태까지의 노예제 반대 운동이나 반대 법안을 일거에 무효로 만들었다. 남부는 환호했고 북부는 분노했다. 양쪽의 반목 대립은 더욱 고조됐다. (드레드 스콧 재판은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 가치를 노예제도 유지 목적에 끌어다 썼다는 점에서 미국 대법원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기록되었다.)
그 무렵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링컨은 이미 2년 전 행한 연설에서 ‘분열된 집은 바로 설 수 없다(A divided house cannot stand)’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남과 북은 1860년 선거에서 사활을 걸고 싸웠다. 당시 미 합중국에 가입된 주는 모두 33개 주였다. 그중 18개는 자유주, 15개가 노예주였다. 링컨은 남부 9개주에선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을 확보해 16대 대통령이 됐다.
남부는 링컨 당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연방 분열은 기정사실이 됐다. 제일 먼저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을 탈퇴했다. 이어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가 뒤를 이었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도 뒤를 따랐다. 이들 남부연합은 독자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를 대통령으로 세웠다. 이로써 미합중국은 건국 84년 만에 두 나라로 완전히 쪼개졌다. 연방을 지키는 길은 전쟁밖에 없었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시민권 시험 문제 풀이
문. 어떤 사람들이 미국에 노예로 팔려 왔나? (What group of people was taken to America and sold as slaves?)
답. 아프리카인(Africans) /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people from Africa)
문. 미국 남부와 북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무엇이라 하는가? (Name the U.S. war between the North and the South.)
답. The Civil War(남북전쟁) / 주들 간의 전쟁(the War between the States)
문. 남북전쟁이 일어난 원인 하나만 말해 보라. (Name one problem that led to the Civil War.)
답. 노예제도(Slavery) / 경제적인 이유(economic reasons) / 주 정부의 권한(states’ rig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