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 아이를 바르게 성장하도록 이끄는 힘은 바로 부모의 말과 행동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배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그 제목만으로도 마음에 따뜻함을 느껴 선택했던 책이다. 원제목 〈The Education of Little Tree〉가 말해주듯 주이 책은 주인공 작은나무가 세상을 배워가는 성장소설이다. 자연이 들려주는 영혼의 지혜가 담겨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대사가 모두 가르침이 된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대공황 무렵. 인디언 소년 작은나무는 다섯 살 때 부모를 잃고 체로키족 혈통을 이어받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산속에서 살게 된다. 작은나무는 사냥과 농사일, 위스키 제조 등 할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을 자연에서 얻는 인디언식 생활방식을 터득해 나간다.. 그들은 가장 작고 약한 동물만을 죽인다. 그래야 크고 강한 동물들이 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꿀벌들은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하기 때문에 곰한테 너구리한테 체로키한테 뺏기는 거라며, 사람들도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죽어가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래서 체로키들은 영혼이 빠져나간 통나무만을 땔감으로 쓰고, 절대 취미 삼아 낚시를 하거나 짐승을 사냥하지 않는다.
작은나무는 할머니한테서 읽기와 쓰기, 산수 등을 배우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셰익스피어나 워싱턴 전기 등의 책을 할머니가 낭독해 주는 것을 들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운다.. 할머니는 영혼에 관해 들려준다. 사람은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 다른 하나는 영혼의 마음이다. 만약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남을 해칠 일만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을 이용해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영혼의 마음을 크고 튼튼하게 가꾸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뿐이다. 이해는 사랑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하는 체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심오한 삶의 철학이다. 현대인들이 인디언의 생활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체로키족의 모습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체로키족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비해 놓고 조용히 맞이한다. 할아버지의 친구 윌로 존은 살았을 적 소나무가 많은 씨앗을 퍼뜨려 따뜻하게 해주고 감싸주었으니 이젠 소나무 옆에 묻혀 소나무의 거름이 되겠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날마다 산을 오를 때마다 생전 처음으로 그 모습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산이 깨어나고 있어!”라고 말하던 그곳, 자신만의 비밀장소에 묻힌다.
작은나무가 겪은 일 중에 가장 슬픈 일은 억지로 고아원에 보내진 것이다. 작은나무의 조부모가 교육받지 못했고 인디언인데다 외할아버지가 밀주 제조 혐의로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는 전과자여서 아이를 기를 자격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고아원은 작은나무에게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작은 나무’는 고아원을 운영하는 목사한테서 사생아라 불리며 멸시받고 가혹하게 매를 맞는다. 다행히 할아버지 친구인 윌로 존의 도움으로 작은 나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평온한 시간도 잠시 윌로 존의 죽음에 이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작은나무는 홀로 세상에 남겨진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다운 삶의 지속은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나온다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꾸어야 하며, 그 비결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물질주의의 거대한 급류에 휘말려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설교’는 한 가닥 지푸라기만도 못한 주제일 수 있다. 하찮은 들꽃 하나, 작은 나무 한 그루에 스며들어 있는 ‘영혼’을 그들은 믿지 않으려고 하니까. “당신이 태어났을 때 그대는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그대가 죽을 때는 세상은 울고 그대는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라.” 체로키족의 잠언이다.
손녀에게도 이 책을 읽히고 싶어졌다.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책을 추천하고 사서 읽혀보라고 일러주었다. 얼마 후 아들 집에 들렀을 때 손녀의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발견했다. 물론 영어로 된 원서였다. 10년 전 우리 부부가 중국애서 돌아왔을 때 그 애는 네 살의 꼬마였다. 엄마 아빠가 모두 일하기 때문에 그 애와 함께 지내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몫이었다. 우리 부부는 손녀와 함께 놀아주면서 할아버지는 한글을 가르치고 할머니는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 애는 성경의 에스더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애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 손녀가 판타지 소설을 출간했다. 14살 짜리 중학생이 쓴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400쪽이 넘는 꽤 두께가 있는 공상소설이다. 전화를 걸어 격려해주고 언제 이걸 썼느냐고 물었더니 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에 갇혀 지내는 동안 틈틈이 썼다고 한다. ‘아이들은 쓰면서 자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글로 쓰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거듭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궁리하면서 자란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문장 하나 쓰는 게 얼마나 고독한 작업인가를. 글이 잘 써지지 않거나 미래가 불안할 때마다 헤밍웨이는 옥탑방 창가에 서서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에게 말하곤 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한 문장을 써 봐…” 바로 내가 손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