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노예해방 선언 후 전쟁 목적 달라져
북군 승리로 연방 지켰지만 후유증도 커
#. 시작과 경과
1861년 4월 12일 첫 포성이 울렸다. 남부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항구 내 연방군 섬터 요새(Fort Sumter)의 성조기를 향해 포격했다. 북부는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모욕한 것”’이라며 분노했다. 전쟁은 시작됐다. 남부는 의기양양했다. 전쟁이 터지자 당시 남부의 분위기를 어떤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남자들은 모두 참전 준비를 마쳤고 여인들은 같은 열정으로 남편을 환송했으며 사내아이들은 모두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양쪽 군대는 똑같은 언어를 썼고 구호도 비슷했다. 지휘관들 역시 똑같이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 출신이었다. 하지만 애국 방향은 서로 달랐다.
북부의 애국은 미합중국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남부의 애국은 떨어져 나온 남부연합을 사수하고 고향을 지키는 것이었다. 전쟁의 승패에 따라 미합중국의 통일이 유지될 수도, 적대적인 두 나라로 쪼개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객관적 전력은 북군이 압도적이었다. 자원이 풍부했고 생산력이 월등했으며 인구도 많았다. 당시 남부 인구는 900만명, 북부는 2100만명이었다. 부설된 철도 길이만 해도 북부는 2만1700마일이었지만 남부는 9000마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쟁이 물리력만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부연합의 사기는 북부를 능가했다. 남부는 전쟁 초반 연전연승했다. 진격의 나팔 소리가 우렁찼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1862년 9월 7일, 밀리던 북군이 메릴랜드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에서 승리했다. 전세 역전의 신호탄이었다. 닷새 뒤 링컨은 역사적인 노예해방((Emancipation Proclamation)을 선언했다. 1863년 새해 첫날을 기해 미국 내 모든 주의 노예를 해방한다는 내용이었다.
섬터 요새, 실로, 게티스버그 전투 등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우표들. 맨 오른쪽은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1865년 4월 9일 애퍼머턱스 법정에서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이다. [중앙포토]
파장은 엄청났다. 노예해방 선언으로 전쟁의 목적과 성격이 바뀌었다. 북부는 인류의 양심과 자유의 존엄을 지킨다는 도덕적 우위에 서게 됐다. 민심 또한 북부로 돌아섰다. 수많은 노예가 자유인으로 풀려났고 남부의 흑인 노예들은 도망쳐 북군에 가담했다.
북군에 편입돼 싸운 흑인은 21만 명에 이르렀다. 남부연합에 우호적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마음도 돌려놓았다. 전세는 북군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1863년 7월 2일 게티스버그 전투는 마지막 분수령이었다. 남군 7만 5천, 북군 9만 명이 대치했다. 사흘 간의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졌고 평온했던 게티스버그 들판은 시체로 뒤덮였다. 남군은 퇴각했다. 죽거나 다친 사상자는 양측 합쳐 5만 명이 넘었다.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처절한 전투였다.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모두 내 잘못이다”고 독백했다. 링컨 대통령은 승자의 오만을 최대한 자제했다. 1863년 11월 19일, 게티스버그에 세워진 전몰자 묘지와 충혼탑 헌납식에서 링컨 대통령은 간결하지만 확실한 메시지를 전했다.
“이들 전사자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리라 굳게 맹세하는 것…. 그것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 미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연설로 불리는 ‘게티스버그 연설’이었다.
남군과 북군의 뛰어난 장군들을 기념한 우표들. 위 왼쪽 우표는 왼쪽부터 남부연합군 로버트 리, 스톤월 잭슨 장군, 오른쪽 우표는 왼쪽부터 북군의 셔먼, 그랜트, 셰리던 장군. 아래 왼쪽은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1807~1870) 장군, 오른쪽은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1822~1885) 장군. 그랜트는 남북전쟁 후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중앙포토]
#. 전쟁의 마무리
1865년 1월, 남북전쟁이 북군 승리로 귀결되어갈 즈음 연방의회는 노예제도를 전면금지하는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각 주의 비준을 거쳐 그 해 12월에 정식으로 발효되면서 미국의 노예제도는 공식 소멸됐다. 하지만 법은 법, 현실은 현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된 흑인들에겐 농사지을 땅도, 그들을 지켜줄 법질서도, 보장받을 권리도 없었다. 차별은 더 교묘해졌고 노골화됐다.
1865년 4월 3일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됐다. 4월 9일 남부연합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했다.
리 장군은 유격전이라도 벌이자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청년들의 피를 더는 흘리게 하고 싶지 않다’며 애퍼머턱스 법정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랜트 장군은 리 장군을 존중해 북군 병사들에게 승리의 축포를 쏘지 못하게 했다.
4년여 동족상잔의 전쟁은 끝났다. 북군 36만 명, 남군 26만명, 합쳐서 6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미국 전쟁 역사상 가장 많은 전사자로 기록됐다. 부상자는 북부 27만 명, 남부 10만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 남부인인 민간인 사망자도 5만 명은 넘었을 거라고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1차대전 때 희생된 미군 전사자는 11만 5천명, 2차대전 때는 31만 8000명이었다.
전쟁 후유증은 컸다. 남과 북의 골은 더 깊어졌고 흑백 간 인종적 증오심은 더욱 악화됐다. 21만 명 가까운 흑인이 북군에 합류, 노예해방을 위해 싸웠지만, 그들이 진정한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선 또다시 오랜 시간을 더 견뎌야 했다.
흑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극우 인종차별단체 KKK단(Ku Klux Klan)도 준동했다. 시작은 남북전쟁 직후 테네시주에서였다. 전직 사령관, 남부연합 지도자, 교회 목사 등 백인우월주의자들이 KKK를 주도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리에 관심 보이는 흑인이나, 그 흑인을 돕는 백인들을 강제로 끌어다 집단 구타하고 심할 경우 올가미에 매달아 처형했다.
노예해방을 기념한 우표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지하열차 운동으로 남부 흑인 노예의 탈출을 도왔던 해리엇 터브먼, 노예 금지를 규정한 수정헌법 13조 통과 75주년 기념, 노예해방 선언 150주년 기념 우표. [중앙포토]
# 계속되는 흑백 갈등
1865년 남북 전쟁 막바지에 링컨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3월 4일 취임연설에서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맙시다, 모두에게 자비로운 마음과 확고한 신념으로 우리의 정의로운 임무를 완성합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조국 미합중국의 상처를 치료합시다.” 로버트 리 장군이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기 35일 전이었다.
노예해방 100주년 기념 우표. [중앙포토]
링컨의 재선 임기 중 가장 큰 과제는 남북 간 깊어진 감정의 골을 메우고 황폐해진 남부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관용과 화해로 남북이 다시 하나가 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1865년 4월 15일, 링컨은 남부 극렬주의자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내와 함께 뷰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보던 중이었다. 남부가 항복하고 전쟁이 끝난 지 불과 닷새 뒤였다. 암살자의 이름은 존 부스(John Booth)였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은 ‘노예해방’ 그 하나만으로도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링컨의 가장 큰 업적은 노예해방이 아니라 연방을 지키는 일이었다는 것 평가도 있다. 물론 비판도 따른다. 흑인 노예 400만 명을 해방시키기 위해 젊은 군인 62만 명이나 희생시킨 선택이 최선이었느냐는 것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노예해방, 미합중국 수호라는 그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전국 곳곳에 링컨 기념상이 있고 링컨 이름을 딴 도로나 학교가 있다. 하지만 남부엔 의외로 그런 것들이 드물다. 오히려 패장이었던 남부연합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이나, 전설의 명장 스톤 월 잭슨 장군이 그런 것을 대신하고 있다. 아직도 남부 사람들은 이들을 ‘북부 침략군’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악랄했던 노예제의 상징이자 대표적 인종차별자로재평가받고 있다.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를 경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들 동상 철거 운동을 벌어지고 있는 이유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백인과 흑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피부색이다. 피부가 희면 백인이고 피부가 검으면 흑인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을 구분하는 선은 피부색과 무관하다.
노예제 시절부터 ‘한 방울의 원칙(one drop rule)’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피부색이 하얗더라도 흑인의 피가 한 방울만이라도 섞여 있으면 그는 흑인으로 분류되었다. 흰 피부색 흑인이 백인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몸속에 흐르는 흑인 피를 숨기고 살아가야 했다. (그 유산은 지금도 암암리에 이어지고 있다.)
1956년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 있기 전까지 흑인은 버스에서 백인 옆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다. 투표·교육·고용·공공시설 이용 등에서 일체의 흑백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통과된 것은 1964년이었다. 링컨의 흑인 노예해방선언 후 100년 넘게 지나서였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남북전쟁 전후 노예 해방 관련 주요 연표
-1619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최초의 흑인 노예 들어옴
-1808년 노예수입금지법 통과
-1820년 미주리협정(북위 36도 30분을 경계로 이남은 노예제 허용, 이북은 불허)
-1831년 버지니아 노예 네트 터너 폭동
-1832년 노예반대협회 조직
-1850년 도망노예환송법 제정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으로 1820년 미주리 협정 폐지.
-1857년 연방대법원드레드 스콧 판결
-1859년 노예제 반대론자 존 브라운 반란 (버지니아 하퍼스페리 연방 무기고 공격)
-1860년 링컨 16대 대통령 당선
-1861년 남부 11개 주 연방 탈퇴, 남부연합 결성, 남북전쟁 발발(~1865)
-1862년 링컨 대통령 노예해방 발표
-1863년 노예해방령 공식 발효
-1863년 게티스버그 전투. 링컨 게티스버그 연설(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1865년 노예금지 규정한 수정헌법 13조 통과, 링컨 두 번째 임기 시작, 남부연합 항복, 링컨 대통령 피격 사망.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 에이브러햄 링컨의 중요 업적 중 하나는? (What was one important thing that Abraham Lincoln did?)
답. 노예 해방(Freed the slaves) / 노예 해방 선언 (Emancipation Proclamation) / 연방 보존 혹은 수호 (saved or preserved the Union) / 남북전쟁 중 미합중국을 이끎(led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Civil War)
문. 노예해방선언이 한 일은 무엇인가? (What did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do?)
답. 노예를 해방함(Freed the slaves) / 남부연합 주들의 노예를 해방함(freed slaves in the Confederacy / freed slaves in the Confederate states / freed slaves in most Southern sta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