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LA 폭동 30년 릴레이 인터뷰 5. 하기환 한남체인 회장
성금 기금 기구 단일화 추진, 피해자에 각 3000불씩 전달
평화시위 진행…수만 명 참가, 주 방위군 호위받으며 행진
LA폭동 당시 한인들을 돕기 위해 급박하게 구성됐던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약했던 하기환한남체인 회장은 “(LA폭동은)미주 한인 이민 역사에서 최대 수난이자 비극”이라고 정의 내렸다. 하 회장으로부터 ‘너무나 억울했던 기억’들을 들어봤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된 계기는.
“폭동 발생 다음날(4월30일) LA총영사관에서 단체장 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나는 LA상공회의소 회장 당선인 신분이었지만 한국을 방문 중이던 회장 대신 참석하게 됐다. 당시 한인회는 법정 싸움에 휘말리면서 2명의 한인회장이 대립하는 혼란한 상황이라 총영사관 측과 위원회 관계자들은 논의 끝에 차기 상의회장인 나를 대책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상황은.
“한인타운에 시위대와 갱들이 진입한 것은 폭동 2일째인 30일이었다.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이 벌어졌다. 한인 라디오 방송에서는 ‘한인타운 한인 업주들은 빨리 업소 문을 닫고 귀가하라’는 내용이 계속 흘러나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방송국을 찾아가 ‘우리 비즈니스는 우리가 지켜야지 무슨 말이냐’며 항의했다. 그랬더니 직접 방송에 출연하라고 해서 ‘각자 비즈니스를 지키자’고 호소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나도 권총을 챙겨 올림픽 길에 있는 한남체인으로 가서 쌀, 자동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무장한 직원들과 함께 건물 옥상에 올라가 대비했다. 마침 인근 리커스토어 업주 중에 사냥 동호인들이 있어 각자 집에 있는 총이란 총은 다 가지고 나왔다. 그러던 중 버몬트 쪽에서 수백 명이 나타나 전자제품 업소 매장을 약탈하고 방화까지 했다. 정오부터 2시간 정도 위협용 공포를 수없이 쐈다. 덕분에 시위대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도주했다.
그런데 총격 도중 샷건 오발로 경비원 한 명이 쓰러졌고 오후 5시가 돼서야 소방차가 왔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다. 시신을 수습하던 소방관은 폭도 수백 명이 무장하고 공격에 나설 거라며 대피를 권하기도 했지만 계속 대치하며 밤을 샜다. 덕분에 올림픽길 한인 업소들의 추가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시위대는 8가 길에 있던 대형 미국마켓으로 몰려가 약탈을 시작했다. 당시 소방관들의 출동이 지연되는 바람에 전소된 업소들도 많았다.
또 한인들을 돕기 위해 나섰던 한인 청년이 폭도로 오인 돼 숨지는 안타까운 일도 벌어졌다. 당시 피트 윌슨 주지사는 자동소총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는 이유로 주방위군을 하루 늦게 투입하는 등 한인타운 보호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비상대책위원회의 역할은.
“5월 1일 주 방위군이 4000명으로 증원된 후 혼란한 상황이 통제되기 시작했다. 대책위에서는 2일(토) 한인타운에서 대규모 평화행진을 함으로써 폭동을 끝내자는 안건이 논의됐다. 안전문제로 반대가 심했지만 나는 한미연합회(KAC) 창립자인 정동수 변호사와 함께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그날 한인 수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주 방위군의 호위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사실상 폭동 종료라는 의미가 있었다.
피해자들 지원과 관련해 자연재해 피해 복구를 지원하는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폭동은 인재라 지원 대상이 안 된다고 했지만, 강력히 지원을 요청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한인타운을 방문하면서 FEMA, SBA(연방중소기업청) 등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이 신속히 진행됐다.
대통령 방문 전 백악관 관계자로부터 연락이 와 한인 피해 상황, 방문지역, 예상 질문 등에 대한 안내와 조언을 해줬다. 한인회계사협회에서는 피해를 많이 본 스왓밉 업주들을 위해 SBA 융자지원 신청서 작성을 도왔다. 1년 6개월까지 모기지 지원도 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 연방 차원의 지원만 있었을 뿐 주정부 차원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성금 모금과 배포는 어떻게 진행됐나.
“각지에서 성금이 들어오기 시작해 기금 창구를 대책위로 일원화하자고 제안해 성사됐다. 급한 대로 피해자 500명에게 500달러씩 나눠주겠다고 발표했으나 2300여명이 넘는 피해자들의 항의가 거세 전원 배포로 전환했다. 결국 피해자 한명당 3000달러 가까이 지급된 것으로 기억한다.
수령 한인들은 주로 리커스토어, 스왑밋 업주들이었으나 일부는 피해 사실을 허위로 신고해 받아간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 성금과 관련해 분란이 일자 언론들이 이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추가 지원을 받을 기회를 놓친 꼴이 됐다.
실제로 당시 김종필 총리, 김대중 야당 대표도 찾아와 지원 의사를 타진했으나 성금 관련 분란으로 철회 또는 축소됐다. 대책위는 나중에 성금관리위원회로 변경돼 남은 기금을 관리했는데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성금을 놓고 자체 분란이 일어난 점, 피해 규모 상관없이 동일 액수가 배포된 점 등은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다. 신뢰를 바탕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금전 관련해 투명성이 필요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한인 커뮤니티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이민 1세대들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무장해 맞선 것은 미국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많은 희생과 경제적 타격 후 정말 어렵게 회복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미국이란 사회에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 같은 참사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만의 나라가 아니다.”
박낙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