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침묵〉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절정에 달했던 일본의 에도막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종교소설이다.
엔도 슈사쿠는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의 문제를 17세기 일본 기독교 선교 당시의 박해 상황을 소재로 하여 치밀하게 묻고 있다.
성화를 밟아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즉 종교적 신앙과 인간적 실존이 상치되는 순간, 로마교황청의 파견 신부 로드리고는 십자가 앞에서 침묵하는 신을 향해 그리스도를 반추하며 신의 침묵의 의미를 묻게 된다.
“주교였던 페라이리 신부가 배교했다.” 〈침묵〉의 첫 대목은 서늘하기만 하다. 주교라는 최고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사제와 신도를 통솔해 온 성직자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이다. 1614년 일본인을 포함하여 70여 명의 가톨릭 신부들은 추방을 당했는데, 페라이라 신부는 일본인 신도를 버리고 갈 수 없어 잠복하여 선교 보고서를 보냈던 이였다. 감동적인 선교 보고서를 보내곤 하던 그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자, 믿을 수 없었던 그의 제자 로드리고 신부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것으로 〈침묵〉은 시작된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 도착한 로드리고와 가르페 신부는 신도들의 도움으로 신도들에게 성례성사를 베풀고 고해성사를 하면서도 페레이라 신부의 행적을 찾아봤으나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배교한 경험이 있는 일본 청년 기치지로의 밀고로 두 신부는 일본 신자들과 함께 잡히게 된다. 로드리고는 가차 없이 참수당하는 가르페 신부와 일본 신자들의 모습 속에서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다.
일본 관리는 예수의 모습이 그려진 성화를 밟게 함으로 신자들을 구별하거나 배교를 유도하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성도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성화를 밟기보다 죽음을 택하는 일본 사람들의 신앙을 로드리고 신부는 목도하게 된다. 어떠한 고문이 닥쳐도 결코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신앙인의 실존, 옆방에서 인간의 미약한 소리가 간수의 코고는 소리로 들리지만 실은 고통에 신음하는 신도들의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 몸서리치면서 배교하여 사와노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고 있는 페레이라 신부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참혹하리만큼 고통스럽게 신앙으로 인하여 또는 신부를 위하여 죽어가는 일본 성도들의 모습을 견디면서 컴컴한 감옥 벽에 손가락이 문드러질 정도로 새겨 넣은 ‘주님을 찬양하라’는 글을 써넣으며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 하나님의 침묵을 괴로워하며 저들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도 배교했을 것이라는 페레이라 신부의 말에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기로 결심한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많은 일본인들이 밟아서 우묵하게 들어간 성화 속의 그분의 얼굴은 괴로운 듯이 로드리게 신부의 모습을 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렇게 배교한 로드리게 신부에게 사람들은 ‘배교자 베드로’라고 경멸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럴 즈음 자신을 밀고했던 기치지로가 찾아와 고해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고해를 자신은 이제 신부가 아니라며 거부하는 로드리고에게 기치지로는 울먹이며 말한다.
“이 세상에는 말입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는 어떤 고통이라도 극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만, 저 같이 천성이 약한 자는 성화를 밟으라는 관리의 고문을 받으면.… “그런 키치지로에게 로드리게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이 일본 땅에 당신의 고해를 들을 신부가 없다면, 내가 기도의 말씀을 외우겠소. 모든 고해의 마지막에 올리는 기도를.…”
이 작품에서 특이한 인물은 누구보다도 기치지로이다.
일본인 ‘가롯 유다’로 불릴 만큼 비굴한 배신자 기치지로. 믿음을 지킬 만큼 강하지도, 완전히 신부를 저버릴 만큼 사악하지도 않은 사나이. 로드리고는 그를 누더기를 걸친 거지같고 경멸스러우며 교활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는 성화를 밟고 배교한 위에 신도들을 밀고하고 로드리고를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도무지 그 어디에도 사랑스러운 면이나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큰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로드리고를 따라 다닌다. 성화를 밟으며 배교하고, 동료들에 대한 배신도 서슴지 않지만, 계속 로드리고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이 세상에는 말입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는 어떤 고통이라도 극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만, 저같이 천성이 약한 자는 성화를 밟으라는 관리의 고문을 받으면…” 그는 로드리고의 용서가 없인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러기에 로드리고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알고, 신부를 무서워하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한다. 엔도 슈사쿠는 이 인물을 가리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나가사키의 소토메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무대가 된 기독교인 마을이다. 이 마을에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비’가 있는데 여기에는 이런 비명이 새겨져 있다.‘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 푸르릅니다.’슬픔을 가슴 가득히 껴안고 영원의 세계로 돌아가는 한 작가의 살 떨리는 아픔이 느껴지는 비명(碑銘)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일까. 왜 하나님은 악과 불의에 대해 침묵하실까.
우리가 고통 속에서 신음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 신앙의 모든 문제를 누가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저 물음으로 마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우리도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인간은 한번 몸을 받고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한다. 서로 죽이고 해치며 사는 우리 삶은 달리는 말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 이 또한 슬프지 않은가.’검수완박(검찰수사권완전박탈)’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야가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받아들인 것은 서로의 입맛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결국 우리나라는 부패공화국이 되고 그 피해는 오로지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다.
AI(인공지능)가 거의 모든 것을 대체하는 시대가 되어도 끝내 없어지지 않을 직업은 국회의원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없앨 우려가 있는 법률을 결코 만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 원인은 부정부패에서 기인한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은 만고의 진리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 당연한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다. 법 위에 떼법이 살치기 때문이다. 오늘도 바다는 말이 없다. 인간들은 저토록 아귀다툼인데…. “바다는 한없이 넓고 슬프게 펼쳐져 있지만, 그때도 하나님은 바다 위에서 완고하게 침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