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는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항상 두렵고 어려운 존재로 여기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와 대화도 없어서 추억이라는 것도 없었다. 철저한 건강관리로 병원을 모르고 지내셨지만,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했던 나는 어머니 치마 뒤에 숨어 아버지를 멀리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미움으로 바뀌고, 힘 없던 나는 강한 아버지로부터 도망하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었다.
아버지에 대한 오랜 갈등과 오해는 나의 미국 이민 결정에도 영향이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이민을 찬성하셨지만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으셨다. 갑작스럽게 이민을 결정하고 아내와 두 아이를 먼저 미국에 보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나도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공항으로 이동하면서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었고, 나 또한 달리는 차창밖으로 보이는 내 나라의 마지막 풍경만 챙기고 있었다.
수속 후 출국장 앞에서 인사를 마치고 떠나려할 때 갑자기 아버지는 ‘동안아! 한번 안아보자’ 하시며 힘껏 나를 안아 주시고는 ‘잘 살아라! 도착하면 연락하고’ 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가슴으로 전해오는 심장의 울림은 지난 반백년 간의 어색함을 깨트렸다. 그리고, 등으로 전해지는 손바닥의 작은 진동을 통해 아버지의 숨겨왔던 사랑이 고스란히 허파 속 깊은 곳까지 채워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늦어져 버린 후회로 떨어지는 눈물이 아버지의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도망치듯 건너 온 미국땅에서 부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우리 4남매 중에 기도제목의 일순위로 자리매김하고 항상 걱정과 근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이민의 삶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하루하루를 벼랑끝에서 보내듯 물질적인 어려움과 신분의 연결고리들로 지쳐가고 있었다.
살아 왔던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의 문화적 차이가 크다 하더라도 바로 적응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처럼 우리 가정도 점점 이곳의 삶에 맞추어 살아가게 되었다. 생활의 안정을 찾아 가면서 제일 먼저 한국의 부모님에게 우리의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민자들의 삶이 그렇듯 정착하기 전까지는 항상 시간에 쫓겨 여유가 없는 편이었다. 매번 미국에 오실 때마다 말도 모르고 길도 몰라 집에서 자식들 올 때만 기다리며 철창없는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며 살고 있는 우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셨다.
항상 강한 태산같이 보였던 아버지였지만 세월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 온 심장판막 승모근 파열이라는 생경스러운 진단명은 좋아하시던 운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호흡장애로 인하여 통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 하시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막히며 터질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신장과 간에까지 합병증이 생기면서 더 이상 미국에는 오시지 못할 것 같았다.
신분이 아직 해결되지 않아 한국에 나갈 수 없었던 나는 아버지 살아 계실 때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지냈다.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간절함보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더 컸는지 아버지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병세가 많이 좋아 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게다가 앞으로 건강 관리를 잘 하시면 미국 방문도 가능하다는 의사 소견까지 있었다고 했다. 희망적인 소식은 아버지에게 큰 힘이 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두 여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서둘러 출발했지만 우리는 애틀랜타 공항 입국장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벌써 입국 절차를 마치고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달려가 힘껏 껴안았다. 다시는 안아보지 못할 것 같던 아버지의 품이었는데, 따뜻한 체온을 잘 간직한 채 먼 거리를 기적같이 날아오셨다. 여전히 귓가를 울리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초로의 아들과 팔순의 아버지는 평생 아껴왔던 사랑을 모두 모아 긴 포옹을 했다.
오지 않기를 바라며 애써 밀어 내도 무심한 날은 찾아오고 헤어져야 할 때는 어김없이 다가왔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아무 말도 못하는데, 공항 내에는 알아듣기 어려운 안내방송만 떠들며 우리의 이별을 독촉했다. 무거운 발을 옮기려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마치 차가운 시계바늘이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찔러대는 것 같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꼭 말하고 싶었던 ‘아버지!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라고 하면서 안았다. 맞닿은 뺨 사이로 느껴지는 아버지의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는 먼 훗날 다시 만날 때까지 가져갈 마지막 포옹이 되었다.
집 앞에 빨간 동백이 꽃망울을 터뜨리던 3월 새벽, 갑자기 막내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신장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어 혈액 투석을 해야 한다며 울먹였다. 병원에 입원시켜드린 후 투석을 하면서 혈색도 돌아오고 건강도 호전되었다. 일주일에 3회 투석을 하면서 경과를 보고 2회로 줄여 보자는 소견과 함께 퇴원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코비드19의 영향으로 병원 방문이 쉽지 않았던 시기라 일반 병실로 옮겨 투석을 받기로 했다.
큰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서로의 자리에서 하루의 일과에 전념하며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이들이 모두 집에 모여 있었던 6월 첫 주말 오후였다. 마침 한국에서 화상 통화 연락을 받고 병원에 입원 중이신 아버지와 통화하게 되었다. 예뻐하시던 손녀딸과 화상통화를 할 때 아버지의 밝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누려보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흘 후 2020년 6월 9일 저녁에 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빠! 아버지께서 조금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 주무시는 것처럼 얼굴이 아주 편한 모습이야. 마지막으로 자식들 모두 잘 만나고 편한 마음으로 하늘나라 가셨어.”
떨어진 동백꽃을 두고 남아 있는 잎들이 작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조동안
– 시인
– 2007년 도미
– 애틀랜타 문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