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권 제한’ 대법관 의견에 찬반 시위대 몰려나와
“대법원 역겹다” vs “낙태가 미국 산산조각 내”
“낙태는 선택의 문제다” , “삶을 우리가 결정해선 안 된다”
3일 오후 워싱턴DC에 있는 연방대법원 앞에서 한바탕 논쟁이 붙었다. 낙태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에 한참 동안 고성이 오갔다.
미국이 또다시 둘로 갈라졌다. 미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보장해온 기존 판례를 뒤집기로 방침을 정한 판결 초안을 마련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미 전역이 들썩이고 있다.
2020년 여름 백인 경찰에 목이 짓눌려 사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논란에 미국이 반으로 쪼개진 지 2년도 안 된 시점이다.
연방대법원의 판결 초안이 유출돼 보도되자 진원지인 연방대법원 앞은 온종일 낙태 찬반론자들로 떠들썩했다.
앞서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전날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작성해 대법원 내 회람한 다수 의견서 초안을 입수했다면서 대법원이 여성의 낙태 권리를 보장한 이른바 ‘로 대(對) 웨이드’ 판례를 뒤집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1973년에 내려진 이 판결은 미국에서 낙태에 관한 헌법상의 권리를 보장한 기념비적인 ‘결정’이었다.
이후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 논란이 제기될 때마다 이 판례가 재확인되면서 반세기 가까이동안 사실상 법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에서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3명 임명되면서 연방대법원 구성이 보수 우위로 재편된 뒤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연방대법원이 작년부터 낙태 가능 기준을 임신 15주로 좁힌 미시시피주의 법률을 들여다보며 올 여름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이 예고된 터였다.
미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논쟁거리 중 하나인 낙태 이슈는 자유와 생명 존중에 대한 가치, 진보와 보수, 종교적 신념 등이 맞물린 ‘뜨거운 감자’다.
이런 중차대한 사안이 정식 판결도 내려지기 전 초안이 유출되면서 낙태 찬성론자를 중심으로 큰 반발이 일고 있다.
시위를 하고 있는 낙태 찬성론자들 3일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앞에서 낙태 찬성론자들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이날 연방대법원 앞에는 300∼400명의 찬반론자가 각종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보도된 대법원의 판결 초안이 낙태 찬성론자들의 주장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기에 얼핏 보기에도 대법원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내 몸에 대한 선택은 내가 한다’, ‘낙태는 건강 관리다’ 등의 패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보수 성향으로 뒤바뀐 대법원에 항의했다.
‘법원을 낙태시켜라'(Abort the court), ‘법원은 당신의 권리에 관심이 없다'(This court doesn’t care about your rights)는 구호도 등장했다.
곳곳에서 찬반론자들이 논쟁을 벌이는 모습도 보였다.
40세 남성인 조나단 다널 씨가 낙태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자 한 여성이 다가와 “이것은 양심(conscience)에 관한 게 아니라 선택(choice)에 관한 문제다. 원치 않은 임신이면 아이의 인생에 영향을 준다”라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다널은 곧바로 “맞다. 하지만 살아서 불행한 게 죽는 것보다 낫다. 최소한 그들의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가 결정 지어선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기자에게 자신이 복음주의 기독교 단체 소속이라고 밝히면서 “낙태는 미국에서 사망의 주요 원인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를 산산조각 내고 있다”고 말했다.
3일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앞에서 아이네즈 씨 모녀가 낙태 찬성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대법원에 항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25세 딸 애니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고 밝힌 여성 아이네즈(66) 씨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고 싶어 이 자리에 왔다”며 “낙태 합법화는 여성의 건강 관리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 모녀는 ‘교회보다 선택권이 우선’, ‘우리 몸에 금지사항을 걸지 말라’는 내용을 직접 도화지에 쓴 뒤 이것을 들고 대법원 앞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개별 시위를 벌였다.
역시 낙태권을 옹호하는 26세 여성 메이브 브레이즐리 씨는 “역사의 일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이 자리에 나왔다”며 “모두가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 지금은 그것(낙태 이슈)에 대해 얘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보도된 대법원의 초안 판결문에 대해 “역겹다”고 비판하면서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다. 바로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방대법원 앞에서 조안 맥키 씨가 낙태 반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천주교 신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 조안 맥키(81) 씨는 “낙태는 살인이다. 아기를 죽이는 것”이라며 “기도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보도된 대법원 판결문 초안을 환영하면서 “법이 바뀌어 우리 아기들을 죽이는 짓을 그만둬야 한다. 모든 아기는 소중하다”며 “성관계는 놀이터가 아니다. 그것은 결혼만을 위한 것이며, 배우자에게 아기들을 잘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이란 주장을 펼쳤다.
경찰은 3일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앞 도로를 통제하고 낙태 찬반론자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에 대비해 시위를 주시하고 있다.
경찰은 혹여나 발생할 수 있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대법원 정문 앞 도로를 경찰차와 바리케이드로 막고 차량을 통제했으며, 경찰관들이 곳곳에 배치돼 찬반론자 사이의 물리적인 충돌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폭발력이 강한 이슈인만큼 언론들도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현지 방송사들은 주요 방송시간마다 정치인이나 관련단체 관계자 인터뷰 또는 찬반 대담을 내보내는 한편, 수시로 대법원 앞 광경을 비추며 열띤 논란의 현장을 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