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탤런트로 연기 인생 시작
미국 와선 ‘성공-실패’ 쓴 경험
애틀랜타서 연극 예술 꽃피워
한국학교·한인회 등서도 봉사
지난 2월 10일 자 애틀랜타 중앙일보에 이색 기사가 실렸다.
애틀랜타 연극인협회를 소개하며, 다시 무대에 설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연극인들의 바람을 전한 내용이었다.
이 연극인 협회의 전신이 있었다. 1990년 출범한 연극방송동우회가 그것이다. 초대 회장이 권명오씨였다.
그는 동우회 출범 때부터 20년 가까이 애틀랜타 연극 활동을 이끌며 한인사회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지난 4월 중순, 둘루스 중앙일보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86세 원로 연극인이 풀어놓은 이야기는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또 다른 역사였다.
– 한국에서부터 연극을 하셨더군요.
“예, 신무대실험극회라는 연극 모임의 창립멤버였습니다. 최불암, 이철향, 이묵원씨 등이 같은 회원이었죠. 이철향씨는 70년대 인기 드라마 ‘아씨’를 쓴 극작가였고 이묵원씨는 강부자씨 남편입니다. 나중엔 나문희씨도 합류했습니다.”
– 애틀랜타에서도 활발하게 연극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동우회 출범 이야기부터 해 주시지요.
“연극에 관심 둔 사람 몇몇이 의기투합해서 시작했습니다. 애틀랜타에서도 제대로 된 연극 예술 한번 해 보자고요. 그게 벌써 20년도 더 지났네요.”
연극방송동우회 발족은 당시 애틀랜타 한인사회에서는 큰 뉴스였다. 1990년 3월 13일 자주간동남부 신문은 그때를 이렇게 전한다. “아틀란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 중 한국에서 연극무대와 TV 방송국 등에서 연극예술에 종사했던 예술인들이 모임을 갖고 ‘연극방송동우회’를 발족시켰다.
지난 3월 4일 오후 7시 심중구씨(한미방송 대표)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과거 연극예술활동에 대한 향수와 이 지역 예술 문화활동에 필요성을 느껴 몇 차례의 준비모임을 가진 끝에 이날 발족 모임을 가졌다.”
당시 상황은 권 회장의 노트에도 꼼꼼히 기록돼 있었다. 노트 기록에 따르면 첫 발기인은 회장 권명오, 총무 정바른, 감사 한만희, 심중구, 재무 김철 외에 김동식, 최왈수 등 7명이었다. 권 회장은 1995년까지 동우회 회장을 맡았다. 이후 매 정기 공연작 연출을 잇달아 맡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연극방송동우회는 2006년에 지금의 연극인협회로 명칭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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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공연은 어떤 작품이었나요?
“’1992년 봄 무대에 올린 ‘아메리카 저메리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정하연 씨가 극본을 썼고 제가 연출을 맡았죠. 이민사회의 고난과 갈등, 애환을 그린 연극이었습니다. 13명의 연기자가 일요일까지 반납하면서 1년 가까이 땀 흘려 연습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3월 14, 15일 이틀간 애틀랜타 플레이하우스에서 공연했는데 연인원 750명이라는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1992년 첫 작품 ‘아메리카 저메리카’ 공연 기념사진 [권명오 회장 제공]
– 무대에 올렸던 연극은 그렇게 다 기억하시는군요.
“물론입니다. 첫 창단 공연 성공에 고무돼 이듬해 2회 정기 공연으로 고전 해학극 ‘강릉 매화전’(조지아텍 예술극장, 정바른 연출)을 다시 무대에 올렸죠. 역시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권 회장은 스크랩 노트를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노트엔 공연 관련 기사 스크랩이 빼곡했다. 도라지 강도(1994년), 번지 없는 주막(1995년), 오렌지카운티의 사람들(1996년), 일요일의 불청객(1997년), 홍도야 울지마라(1999년), 울고 넘는 박달재(2006년), 어머니(2007년) 등에 관한 기록이었다. 작품마다 권 회장의 열정이 녹아있었음은 물론이다. 공연은 2007년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연극동우회 초창기 기록을 꼼꼼히 정리한 노트와 스크랩 기사들.
-더 이상 공연이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컸겠습니다.
“그렇죠. 지금처럼 애틀랜타 한인 인구가 많지 않았는데도 그때는 다들 열정 하나로 연극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관객도 700~800명까지도 몰렸지만, 그걸로 재정적인 뒷받침은 안 되었어요. 여러 후원자, 독지가의 도움 덕분에 공연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인사회가 커지고 경제적으로도 훨씬 여유가 있어졌지만, 오히려 힘든 상황이 되고 말았네요.”
권 회장의 얼굴에 언뜻 애수 어린 표정이 스쳤다. 그는 애틀랜타 한인사회가 이제는 성장에 걸맞게 연극뿐 아니라 다른 문화 활동에도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한참이나 이야기했다.
1999년 공연작 ‘홍도야 울지마라’ 출연진들과 함께 한 기념사진. [권명오 회장 제공].
2006년 ‘울고 넘는 박달재’ 공연 기념 사진. 가운데 줄 오른쪽 6번째가 한국에서 탤런트이자 전문 연극배우로 활동한 김복희씨, 가운데 줄 왼쪽 첫번째 안경 낀 사람이 연출자 권명오씨다. [권명오 회장 제공]
– 미국 오기 전 한국에서도 연기자로 활동했었다지요.
“KBS 공채 탤런트 2기였습니다. 강부자씨가 동기죠. 당시 탤런트들은 대부분 저처럼 연극 활동을 하다 TV로 진출하게 된 거죠. ”
-TV 드라마에도 출연했겠군요.
“여러 편 했죠. ‘정명 아씨’라는 사극에서 김민자 씨와 호흡을 맞췄습니다. 실화극장 ‘0시 지령’에서는 최무룡, 윤정희와 같이 공연했고요. 미국 오기 직전에는 국민 드라마 ‘여로’에도 하인역으로 오랫동안 출연했습니다.”
-미국엔 언제 오셨나요?
“1974년에 왔습니다. 연기자로 나름 잘 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미래가 불안했어요. 그때만 해도 연기만으로 먹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세 아이 장래도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대학생 시위가 잦았는데 모처로 붙들려가서 고초 겪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앞으로 내 아이들이 저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죠. 젊은이들이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부모 입장에서 선뜻 동조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민을 가면 그런 갈등은 안 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동기는 은사님의 권유였습니다.”
-은사님이라니요?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셨고 나중에 교감 선생님도 하셨던 분입니다. 제가 연극영화과를 지원하도록 조언하신 분이기도 하고요. 연기자가 된 후에도 가끔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어느 날 그분이 브라질로 이민을 가시게 됐는데, 그때 하신 말씀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좁은 땅에서 넓은 세계로 나가는 것도 애국이라고 하신 말씀이었지요. 결국 선생님이 먼저 가 계셨던 브라질 이민 수속을 밟았는데 갑자기 그쪽 이민 길이 막히면서 미국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처음 미국 생활은 어땠나요?
“초기 이민자의 전형이었죠. 온갖 일 다 하면서, 성공도 하고 망해보기도 했어요. 1974년에 취업이민으로 미국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미국인 가구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두 달 만에 그만두고 조지아로 와 가발 가게를 했습니다. 더블린이란 소도시였는데 아내와 함께 열심히 일해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가발 가게를 팔고 루이지애나로 갔죠. 거기서도 장사가 잘돼 이번에는 텍사스 휴스턴으로 이주해 귀국선물 센터를 운영했습니다. 처음엔 잘 됐지만 욕심부려 확장한 게 무리수였죠. 결국 쫄딱 망하고 다시 조지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제가 인복이 있어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존스 보로 인근에 세븐마켓을 오픈하고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애틀랜타 한인사회 활동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 연극 외에도 애틀랜타 한인사회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국학교부터 시작해 한인회, 평통, 청소년센터 등 여러 곳에서 활동했죠. 이사, 이사장, 위원, 고문 등등 호칭이 그래서 많습니다. 그래도 가장 오랫동안 관여했던 곳은 한국학교였습니다. 이사로 시작해 이사장도 하고 고문도 하고요.”
– 일을 하다 보면 싫은 소리나 비판도 들었을 텐데요.
“뭐든 많이 하고, 오래 하면 당연하지요. 저도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그리고 그게 나에게 주어졌다면 기꺼이 해야지 했습니다. 열심히 하고, 능력껏 하고, 진심을 다해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스스로 다짐도 해 가면서요. 어떤 사람은 제가 감투욕이 많다고 했는데 그런 건 아닙니다. 한인사회에서 감투라는 게 대부분은 자기 돈 쓰고 자기 시간 들여서 하는 봉사 아닌가요.”
– 가족 이야기도 좀 해 주시죠. 부인께서도 함께 문학회 활동을 하시던데요.
“애틀랜타문학회에서 같이 글도 쓰고 공부도 합니다. 북클럽이라는 독서 모임도 같이 하고요. 애틀랜타 한국학교에서 교사로도 오래 봉사했죠. 미국와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저에겐 언제나 든든한 동반자이지요.”
-부부가 같이 문학을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요.
“맺어진 인연이 좀 특이했습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수백 통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가까워졌거든요. 일종의 연애편지였지만 군대 생활을 하면서 부딪치는 일상과 이런저런 생각들을 나누는 것이었어요. 둘 다 글을 잘 썼던 것 같아요. 미국 오면서 모아놓은 편지들을 챙겨오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그때만큼 감성 넘치고 촉촉한 글은 지금 다시 쓰지는 못하거든요.”
권 회장의 아내는 4살 연하인 안신영씨다.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미국 유수보험회사 중역으로 뉴저지에 산다. 둘째는 애틀랜타에서 꽤 유명한 변호사이고 막내는 의사로 하와이에서 살고 있다.
– 자녀들 교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여기저기 이사도 참 많이 다녔는데도 다들 잘 자라주었습니다. 솔직히 잘해 준 것도 별로 없어 늘 미안했어요. 다만 제가 살면서 욕먹을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위선적이지 않은 부모가 되고자 노력 했습니다. 어쩌면 그게 교육이었던 것 같아요. 자식들도 우리 부모가 늘 최선을 다하는구나 생각하고 믿어준 것 같아요. 고맙죠.”
– 올해 86세신데, 돌아보면 가장 애착이 가는 일은 무엇이었나요?
“아무래도 연극이죠. 어떻게 보면 연기자로는 중도 포기했기 때문에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미국에 와서도 애틀랜타 연극동우회를 이끌면서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게 늘 기쁨이었습니다. 그다음은 한국학교입니다. 사명감도 있었고 보람도 컸고요. 지금도 그렇지만 2세 교육이 잘 돼야 한인사회도 더 발전하는 거잖아요. 같은 연장 선상에서 청소년센터에 매진했던 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문학회 모임이나 북클럽 독서모임도 소중하네요.”
긴 시간 권 회장의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줄곧 맴돈 생각은 수많은 사람의 헌신, 노력, 봉사, 관심이 지금의 애틀랜타 한인사회를 만들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의 수첩에 적혀 있는 사람, 또 얘기 중 언급한 사람들 모두가 한 시절 열심히 한인사회를 위해 뛰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권 회장은 그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다. “제가 인복이 많아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고마운 분들이 손을 내밀어 주었거든요. 감사하죠.”
▶권명오 회장은…
1936년생. 경기도 파주 출생.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1961년 KBS TV 탤런트로 입사, 12년간 방송에 출연했다. 연극 연출 외에 애틀랜타 한국학교 이사, 이사장, 고문을 역임했다. 청소년센터, 민주평통, 한인회 등에서도 봉사했다. .칼럼니스트, 수필가로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지천(支泉)이라는 호가 있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