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연은 가늘게 굵게 끊임없이 이어진다. 크리스 수녀님과 인연을 맺은 지 10년이다. 정기적으로 수녀님을 만나다가 한동안 뵙지 못했다. 수녀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3년 전 수녀님이 앨라배마와 조지아의 주 경계에 있는 ‘Blessed Trinity Shrine Retreat Center’의 책임자 임무를 마칠 적이었다. 그리고 수녀님은 캐나다로 한달 침묵 피정을 떠나셨다.
이번 주말 ‘어머니 날’을 맞이해서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 조지아에 사시는 크리스 수녀님을 초빙해서 성모 마리아의 삶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바람에 나는 반갑게 수녀님과 해후했다. 맑은 눈빛에 웃음기가 가득한 수녀님은 훌쩍한 키에 연약한 모습 예전 그대로 셨다. 몽고메리에 오시면서 혹시 나를 볼까? 하셨는데 내가 나타나서 기쁘다는 수녀님과 포옹하며 나도 수녀님의 기도속에 내가 있어서 기뻤다.
모여 앉은 교인들 앞에서 크리스 수녀님은 유머스럽게 성모님을 소개했다. 남성위주의 고대 사회에서 결혼을 앞둔 사춘기 소녀에게 나타난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는 어린 소녀의 삶을 바꿨다. 그리고 수녀님의 안내로 연약한 소녀에서 만인의 공경을 받는 강인한 어머니로 변하는 과정을 따르면서 나는 나와 크리스 수녀님의 인연을 회상했다.
10년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나는 많이 휘청거렸다. 내 속의 감정을 달래지 못하고 아프고 우울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그때 언젠가 들은 가톨릭 피정센터가 떠올라서 지프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구글로 가까운 피정센터를 찾아서 전화를 했다. 그날 내 전화를 받으신 분이 크리스 수녀님이다. 한번도 피정을 해 본적이 없다는 나에게 수녀님은 마침 며칠 후 한 피정이 시작되니 오라고 하셨다.
피정센터에 도착해서 접수를 했다. 크리스 수녀님이 “왠지 전화를 받은 순간 기도해주고 싶었다”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숙소 열쇠를 주셨다. 그때 종교인들, 부제님들과 수녀님들을 위한 일주일 침묵 피정에 크리스 수녀님은 나를 끼워 주셨다. 사람들을 피하고 달팽이처럼 껍질 속으로 들어가 숨으려던 나에게 침묵 피정은 참으로 적절한 매치였다. 아침과 오후 그리고 저녁에 신부님의 강론이 있었고 나머지 시간은 나름대로 명상을 했다. 나는 7월의 더위도 아랑곳없이 매일 1,200 에이커 천연의 환경을 휘적이고 다녔다.
하늘과 구름과 나무들을 품은 호숫가를 서성이다가 바람 시원한 차타후치 강변을 걷고 여러 방향으로 엮어진 숲 속의 오솔길을 헤매고 다니면서 소리쳐 울고 웃었다. 그런 나를 새들과 사슴들이 지켜봤다. 혼자 여도 혼자가 아니었고 숲 속에서 길을 잃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피정을 마친 후에 나는 수녀님이 내미신 손을 잡았다. 그때부터 수녀님은 나에게 기댈 어깨를 주셨고 뭐든 내가 쏟아내는 감정과 회한의 홍수를 그저 묵묵히 받아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횟수가 늘면서 나도 수녀님의 스토리를 알게됐다. 그녀의 성장기는 역사의 물결을 탔다.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2차대전 후 일본을 재건하는데 기여했고 이어서 한국전이 일어나자 한국 근무도 했다. 아버지가 가져온 동양 물품으로 일본과 한국문화를 소개받았고 유럽문화도 체험했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스위스의 보딩스쿨에서 공부를 마쳤다. 동서양 문화를 접하며 성장한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미국으로 돌아와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타인의 삶에 도움을 주는 헌신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신 지 62년이 됐다.
강론을 끝내신 수녀님과 점심을 같이 먹었다. 나는 그녀가 체험한 30일의 침묵 피정이 궁금했다. 사색과 명상의 나날들은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알고 싶었고 수녀님은 나의 현실을 궁금해 하셨다. 수녀님과 손을 꼭 잡고 서로의 근황을 나누면서 옛친구처럼 편안하게 많은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종교인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고 한 여인이다. 우리가 나눈 사랑은 진실이었고 나의 일상에 성령이 늘 함께 있음을 느낀 벅찬 체험이었다. 마음에 평온을 얻으니 내 영혼은 자유롭게 날았다.
나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침묵 피정을 다시 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것과 몸과 마음으로 대화하면 삶의 이치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크리스 수녀님과 인연을 맺어주신 신의 축복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