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은 북한군은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 그때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 주에 있는 자택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이날 새벽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북한군의 남침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급거 워싱턴으로 귀환했다.
이틀 후인 6월 27일 미국의 참전과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청했다. 미국은 유엔군 작전의 전권을 위임받아 극동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를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했다. 맥아더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6월25일 그는 워싱턴의 승인이 나기도 전에 워커 8군 사령관에게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탄약, 박격포, 소총 등을 실은 배를 즉시 한국으로 출발시키도록 지시했다. 워싱턴엔 7함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맥아더는 28일 새벽 6시 맥아더는 C-54 기(바탄 호)를 타고 폭우 속의 하네다 공항을 출발, 4시간 후 수원 비행장에 내렸다. 북한 전투기가 활주로에 있던 비행기를 공격한 직후였다. 맥아더는 수원의 한 학교 건물에서 이승만 대통령, 무초 대사와 함께 전황 보고를 들었다. 맥아더와 부관 수행원 등 4명이 탄 지프는 한강으로 향했다.
한강 방어선에 이르는 동안 수없이 적의 공습을 받았다. 맥아더가 간신히 한강에 이르러 보니 한국군이 한강 다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맥아더는 영등포 쪽 강둑에 올라서서 불타는 서울을 바라보았다. 북한군이 쏘는 포탄이 주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영등포의 한 진지에서 맥아더는 한국군 일등병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왜 여기를 지키고 있나?”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것이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감동받은 맥아더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
맥아더의 약속대로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은 즉시 실행에 옮겨졌다. 대화가 끝난 후 맥아더는 그에게 연막탄 2개와 대공표지판을 선물로 주었다.
수원으로 돌아온 맥아더 일행은 바탄 호에 타고 오후 6시15분 하네다를 향하여 출발했다. 출발 직후 비행장에 대한 북한 공군기의 공습이 있었다. 워싱턴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른 노장들이 수뇌부에 포진하고 있었다.
한국전 초기 대응의 주역인 트루먼, 애치슨, 브래들리, 맥아더가 6월 25~30일 사이에 얼마나 빠르게 세계사적 영향을 끼치게 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였는가 뒤돌아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이런 신속 대응이 없었더라면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북한군이 부산항을 점령하였을지 모른다.
한반도의 대부분 지역이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인명 피해도 컸다. 전쟁에 참전한 미군 등 유엔군도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들은 그 전에 한 번도 가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나라와 그 국민을 위해 약 15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밴플리트 대장의 아들 짐도 여기에 포함된다. 6·25 남침 때 유엔군의 주력이던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짐은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본국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해외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굳이 자원하여 아버지가 싸우고 있는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 눈물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위해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짐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 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3시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4월 4일 아침 밴플리트 장군은 아들 지미 밴플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되었고,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지시했다.
“지미 밴플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업은 무모하다.”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아들 잃은 아버지의 비통한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한국전쟁에서 미군 장군의 아들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경우는 이밖에도 많다. 마지막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클라크 대위도 금화 지구 저격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 차례나 부상을 당해 전역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중 32명이 전사했다.
워싱턴 DC 한국전쟁 기념관에는 19명의 미군들이 비 오는 날 판초 우의를 입고 행군하는 조각상들이 서있다. 긴장되고 무거운 표정에서 이국땅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비장함이 엿보인다.
조각상 입구 바닥에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라와 그들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추모한다”라고 음각돼 있다. 우리는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어찌 그뿐인가. 지금 우리는 자유의 나라 미국 땅에 와서 살고 있다.
인종차별이니 부당대우니 이런 저런 말도 많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지구상에 이만큼 관대하게 이민자들을 대우해주는 나라는 미국 외에 없다. 며칠 후면 메모리얼 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