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을 걷는데, 길 가에 민들레 씨가 솜털 공처럼 보여 사진 찍었다. 어려서 시골에 살 때 민들레 씨를 꺾어 들고 후 불면 씨들이 낙하산을 타고 날아가던 기억들이 새로워, 조심스럽게 줄기를 꺾어 솜털 공 같은 씨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민들레 씨들이 63개가 가운데 줄기에 동그랗게 붙었고, 씨마다 타고 날아갈 저들만의 낙하산에 달려있다. 낙하산은 가느다란 털 30개 정도가 우산처럼 펼쳐져 있다. 옛날처럼 후 입김을 부니 씨들이 낙하산을 타고 허공 중으로 흩어진다. 씨들은 저마다 실바람에 두둥실 두리둥실 낙하산 타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문득, 70년대 초 미국 유학 와서 아르바이트로 정원에 민들레를 뽑던 일이 생각났다.
인디애나 주의 한 집의 넓은 잔디밭을 잔디 깎는 기계로 밀어도 잡초는 다시 자란다고 잔디밭에서 민들레를 뽑아 달라고 했다. 손가락 넓이의 납작한 쇠꼬챙이로 민들레 뿌리 쪽 땅을 폭 찔러 옆으로 눌러 민들레를 뿌리 채 뽑아 누런 쇼핑백에 담았다. 쇼핑백에 가득히 뽑힌 민들레를 보며 집주인은 수고비를 주었다. 수많은 주택의 잔디밭에 낙하산을 타고 내린 민들레 씨들이 잡초로 자랐다.
“가장 지혜로운 과학자라도 민들레 씨앗 하나 만들 수 있을까? 씨 하나마다 30여개의 가느다란 털을 낙하산 모양으로 섬세하게 만들어, 바람이 불면 두둥실 날아가게 만들 수 있을까?” 공원길을 걸으며 길가 여기 저기에 민들레를 보니 그런 의문이 생겼다. 사람의 지혜와 기술로 사방으로 날아간 민들레 씨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할 수 있을까? 민들레의 생존의 지혜는 어디서 왔을까? 수 억년을 살아오며 조금씩 변하고 바뀐 환경에서 살아남은 것들만 계속 생존하며 진화된 결과일까? 신이 그렇게 창조했을까? 진화설이든 창조설이든 민들레 한 포기가 스스로 살아가는 지혜, 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신성하고 신비롭다.
생각도 못하는 식물들이 나름대로 씨를 퍼트려 번성하는 알려진 방법들은 창조적이고 놀랍다: 야생 콩이 익으면 콩깍지가 뒤틀려 튕겨지고 봉선화처럼 건드리면 껍질이 터져서 씨가 튕겨져서 멀리 번식하는 방법도 있다; 민들레처럼 낙하산을 만들어 타기도 하고 솔 씨처럼 팔랑개비 날개를 만들어 타고 바람에 날리는 방법도 있다; 깽깽이 풀처럼 개미가 먹을 것을 씨에 만들어 개미로 하여금 물어가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법도 있고; 도깨비 바늘이나 파리풀처럼 다른 동물에 붙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하며; 독 넝쿨이나 산수유처럼 다른 동물 특히 새들의 먹이 가 되어 배설을 통하여 퍼트리는 방법들이 잘 알려진 방법들이다. 생각하는 두뇌도 없는 잡초나 나무들이 어떻게 그런 독창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씨를 퍼트릴까! 기적이 따로 없다.
숲길을 걸으면 식물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치루는 치열한 생존 경쟁이 보인다. 큰 나무들은 햇빛 더 많이 받으려 위로 뻗어가는 경쟁을 하며, 그들의 그늘에서 아기 소나무와 떡갈나무가 시들어 죽어간다. 그늘에서 몇 년 자란 나무들은 햇빛에 목말라 위로 자라느라 가늘게 자라다 죽어가고 죽은 나무도 많다. 민들레, 클로버, 달개비 등 작은 잡초들은 큰 나무나 넝쿨 숲을 피해 아예 개척지나 길가, 사람들의 정원에 기식한다.
그런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서 잡풀로 들판은 무성하고 산에는 풍성한 숲을 이룬다. 멀리 거리를 두고 보면 치열한 경쟁은 보이지 않고 무성하고 풍성한 숲만 보인다. 마치 치열한 자유경쟁시장에서 각자가 최선을 다하게 함으로서 사회 전체가 부강하게 되는 모습과 유사하다. 식물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그들의 큰 사명인 먹거리를 만들어 동물들을 먹여 살리며 산소를 계속 보충하고 대기와 환경오염을 정화함으로 동식물이 다 함께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든다.
섬세하게 만든 털 우산 같은 낙하산을 타고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은, 지구를 풍성하게 하는 숲의 한 작디작은 멤버로, 식물이 가지는 큰 미션의 작은 분담 역할을 실행하려, 낙하산을 타고 가는 작은 병사처럼 장해 보인다. 숲을 자세히 보면 그대로의 신비함이 보이고, 있는 그대로를 존경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