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도자는 일신의 안녕과 정파적 이익을 위한 권모술수가 아니라 국가안위와 국리민복을 위해 냉혹한 결단을 감행해야 하는 숙명적 위치에 있다. 백성과 귀족, 군대의 신망과 충성을 받을 수 있는, 마키아벨 리가 제시한 군주상은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한’ 타입이다. 그가 통치자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상고해 본받으라고 하는 군주의 덕목과 통치술은 일단 도덕적 이성적 관념의 잣대와는 무관하다. 인류 보편적으로 소망스러운 것들이 아니라 인류의 실제 역사에서 반복되며 시현된 내용을 추출한 것일 뿐이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도덕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가 도덕적이라고 해서 도덕적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논의의 핵심은 통치술의 기본은 ‘냉철’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절묘한 외교술로 19세기 유럽의 세력균형을 주도하여 독일 통일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널리 알려져 있는 냉혹한 ‘철혈’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유연했고,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했다. 그가 치렀던 덴마크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지 독일 제국의 정복 야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된 참전 용사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파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일은 피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즉위 초기부터 진보파가 장악한 의회와 종종 충돌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의회에서 가진 취임 연설에서 그의 정책기조를 피력한다. “지금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이 유명한 연설로 그는 이후 ‘철혈 재상’의 별명을 얻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엠스 전보사건’이었다. 7월 13일 아침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휴양지 바트 엠스에서 수행원들과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가 빌헬름 1세를 방문해“스페인 왕위계승에 영구히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베네데티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요구한 내용은 빌헬름 1세에게 모욕적인 것이었다. 이런 사실이 베를린에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려졌다. 비스마르크는 의도적으로 전보 내용을 자극적인 문투로 바꿔 공개했다. 프로이센 여론은 일개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국왕을 모욕했다고 분노했다. 엠스 전보를 자극적으로 공개한 것은 독일 통일을 위한 비스마르크의 한 교묘한 함정이었다.
그런데 프랑스는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지도자는 18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가 3년 뒤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한 후 1852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 3세였다. 그는 국내정치 감각은 뛰어났지만 대외정책에서는 큰 삼촌 나폴레옹 1세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질서와 프랑스 국내정치를 주도하기 위해 자신이 프로이센 국왕보다 우위에 있다고 천명하고 싶었기에 프로이센에 먼저 전쟁을 선포했다. 선전포고 이후 사태는 나폴레옹 3세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비스마르크의 계획대로 전개됐다. 1970년 9월 2일 프랑스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군에 대패해 포로가 됐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임시정부가 들어섰고, 10월경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완벽하게 포위한다. 4개월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파리 정부는 결국 항복했다. 파리가 함락되고 몇 달 후인 1871년 5월, 프랑스 임시정부의 행정장관 티에르는 비스마르크와 베르사이유에서 만나 가조약을 맺고 강화했다. 그리고 30년 전쟁 및 나폴레옹 전쟁 때, 빼앗겼던 알자스와 로렌을 되찾아 독일제국의 영토에 병합했다. 더불어 전쟁을 개시한 프랑스에게 책임을 물어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리고 조약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를 파리에 주둔시켰다. 1871년 1월 18일 북독일연방과 남부독일공국들을 합친 독일제국의 탄생과 빌헬름 1세의 독일 황제 즉위식이 프랑스의 유서 깊은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열렸다.
비스마르크의 대외정책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등 서방의 병력 지원 없이 외롭게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냉혹한 국제 안보 질서 속에서 ‘동맹’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의 주적이고 위험할 때 누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인지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에 대비한 한미 연합훈련 확대와 미군 전략자산의 전개 등에 합의했다. 두 정상은 ‘핵은 핵으로 대응한다는 입장도 밝혔다..‘깜짝 쇼’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했다는 환상으로 국민을 눈속임했던 한미 정권이 모두 바뀌면서 비로소 김정은 정권에 대한 상식적 대응이 재개됐다.
북핵이라는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5년이 걸렸다. 지난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동맹이란 단어는 사실상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 우리는 ‘평화’ 또는 ‘평화 프로세스’라는 말에 묻혀 살았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특히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그 ‘평화’의 자리에 ‘동맹’이 정권 교체를 이룬 것이다. 이번 한국 방문 때 바이든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보낼 메시지가 있느냐는 질문에 “헬로, 끝”이라고 답했다. 예전처럼 북한 지도자를 달래거나 띄워주기 위한 보여주기식 만남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정은이 바이든의 인사말에 핵·ICBM 실험 외에 다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 한국, 일본이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호흡을 잘 맞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