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얼 데이 주말에 미시시피 바닷가를 찾았다. 해안가를 따라서 당당하게 버티고 선 꾸부정한 떡갈나무와 가볍게 철썩이는 파도가 출렁이는 확 터인 공간에 나를 맡겼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발가락을 꼼지락 움직이며 하얀 모래밭을 걸으니 세상의 평온이 내 가슴에 가득히 안겼다. 여기저기 흩어져 즐기는 피서객들을 피하며 가벼운 바람에 춤을 추는 갈잎에게 나의 기쁨과 힘겨움을 털어놨다.
최근에 딸네가 집을 사서 이사했다. 이사하는 동안 어린 손주를 봐주려고 애틀란타에 갔었다. 이삿짐이 다 나가고 난 빈 아파트에 내 가족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흩어진 어수선함이 왠지 거슬렸다. 아이는 남편에게 맡겨두고 딸네 부부가 말렸지만 나는 혼자서 빈 아파트로 갔다. 누군가가 이사 들어와서 딸네처럼 즐겁게 살았으면 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온 집안 곳곳을 다니며 쓰레기를 모으고 청소기를 돌리면서 떠오른 시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오래전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려고 읊은 이 시를 읊으니 바로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나오는 구절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 가 생각났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에는 여유가 있다. 상황에 따라 뒷문도 활짝 열려있고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 더불어 동양철학의 예의와 기본도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구절 ‘사느냐 죽느냐’는 단호한 결정을 요구하는 흑과 백이다. 중간 색깔이 없다. 삶과 죽음의 기로인 벼랑 끝에 선 절박함만 가득하다.
우습지만 첫 구절을 읊었을 적에는 청소하는 내 손이 천천히 움직였고, 두번째 구절을 생각하면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딸네가 살았던 흔적을 지우며 잘 자라주었고 또한 든든한 어른이 된 딸과 사위가 자랑스러웠다.
남편이 성당의 ‘Knights of Columbus’ 앨라배마 전역의 대표들이 모이는 회의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는 터스컬루사는 여러번 갔던 곳이라 새로운 유혹이 없고 남편이 속한 가톨릭 형제회는 남자들만 모여서 문을 닫고 회의를 해서 내가 평소에 “비밀사회” 라 부르는 그룹이니 이것 또한 나에게 흥미를 주지 않았다. 남편이 집을 떠나면 나도 어딘가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어서 몇 군데 가 보고 싶은 장소 중에서 야생화로 멋진 곳을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집을 나설 준비를 하는데 부엌 한쪽에 가득 쌓인 남편의 정크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남편이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게 해서 청소를 못한다. 남편은 뭐든 버리는 것을 싫어해서 정크 메일도 쌓아 모으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계속 쌓이는 신문과 메일은 눈에 가시이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고 묵살하고 지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느냐 죽느냐’ 구절이 적절하게 떠올라서 “이때다” 하고 바닥에 앉았다. 잡지들과 중요한 편지는 분류해서 정리하고 후원금을 원하는 비영리단체나 정치인들의 메일은 가차없이 쓰레기로 버렸다. 이왕 시작하는 김에 반경을 넓혀서 리빙룸 여기저기 흩어져 쌓인 메일도 과감하게 정리했다. 큰 쓰레기 백으로 여럿 된 것을 집밖으로 들어내고 집안을 청소하니 기분이 상큼했다.
돌아온 남편을 난 태연하게 맞았다.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남편이 환하게 넓어진 집안을 알아봤다. 두리번거리며 “내 메일들 어디 있느냐?” 물었다. 청소 했다고 답하니 벌컥 화를 냈다. 그날 남편이 화풀이를 하느라 쏟아낸 많은 불평을 나는 얌전히 다 들어줬다. 2박 3일의 자유를 포기하고 청소한 깔끔한 기분은 무자비하게 무너졌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갈수록 사사건건 간섭하고 불평하는 남편과 동거하는 일이 힘든다. 함께 손을 잡고 살다가 나는 남편의 손을 놓고 멀찍이서 혼자 걷는다. 하지만 완전히 시야 밖으로 벗어나지는 않고 슬쩍슬쩍 남편의 동향을 살피며 그의 속도에 맞추어서 내 걸음걸이도 조정한다. “바다 보러 가자” 했다가 “싫어” 한 바람에 이렇게 갈잎과 사귄다. 자연과 사람의 조화는 쉬운데 사람과 사람의 조화는 어렵고 힘겹다. 그렇다고 그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