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터후치강 동쪽 트레일
빼곡히 들어선 죽림 ‘신기’
도심 속 동양적 정취 가득
# 동양인에게 대나무는 각별했다. 사시사철 곧고 푸른 모습은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다. 빈속 또한 겸양의 미덕으로 칭송받았다.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 그림에서도 꿋꿋하고 고고한 기품의 대나무를 으뜸으로 쳤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을 대쪽 같은 사람이라 했듯,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은 군자의 기개를 대변하는 것으로 대나무만한 식물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대나무 숲을 한자로 죽림(竹林)이라 한다. 이 역시 동양에선 신비롭고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겼다. 죽림칠현 고사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대나무 숲에 은거한 일곱 현자 이야기다. 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 초기, 거의 1800년 전이 무대다. 위(魏, 220~265)는 촉, 오와 함께 자웅을 겨뤘던 삼국지에 나오는 바로 그 나라, 조조의 나라였다. 진(晉, 265~420)은 삼국지를 마감한, 조조의 신하였던 사마의와 그 후손이 경영한 나라였다. 위나라 황제 자리를 사실상 찬탈해 세운 나라이기도 했다.
진이 나라를 훔치자 그것이 불의하다 해서 세상을 등지고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충절의 표상이 됐다. 음풍농월, 술이나 마시고 거문고나 뜯으며 보냈지만, 사람들은 그 일곱 사람을 죽림칠현이라 부르며 추앙했다. 그들이 숨어 지냈던 죽림 역시 혼탁한 속세와 떨어져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공간의 대명사가 됐다.
이런 고사를 서양 사람들이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겠다. 대나무 숲의 분위기에 또 어떤 감흥을 느끼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주류 미디어나 잡지에서 심심치 않게 대나무가 보이는 걸 보면 미국에서도 관심은 꽤 있는 것 같다. 대나무 숲 자체의 이국적 매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때 ‘죽의 장막’으로 불렸던 중국, 혹은 동양 문화에 전체에 대한 관심이 커진 탓도 있을 것이다. 오직 댓잎만 먹으며 대나무 숲에서 살아가는 판다곰에 대한 친근감도 호기심을 자아냈을 법하다.
# 조지아 주가 매년 발행하는 공식 여행안내서 ‘익스플로러 조지아(Explore Georgia)’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도 대나무 숲이 소개돼 있다. 2022년판 23페이지, 이스트 팰리세이즈 트레일 대나무숲(East Palisades Trail Bamboo Forest)이 그것이다. 알고 보니 평소 자주 걷던 채터후치 강변 코크란 쇼어스 트레일 인근이었다.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구글 검색으로 주소를 찍었다. 샌디스프링스 인근 채터후치 강변 인디언 트레일 지구가 나왔다. 둘루스 시온마켓 기준으로 차로 30분 정도 거리다. I-285 22번 출구에서 내려 찾아가는데, 이 동네 사람 아니라면 입구 찾기가 쉽지는 않을 듯싶은 도심 속 오지였다.
고급 주택가를 지나자 인디언 트레일 간판이 보였다. 이어 숲속 주차장까지 비포장도로가 이어졌다. 마주 차가 오면 서로 엇갈려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았다. 주차 공간도 별로 없었다. 겨우 30대 정도 댈 수 있을 정도. 하마터면 그냥 돌아 나올뻔했는데운 좋게도 나가는 차가 있어 가까스로 차를 댈 수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 길이 좁다.
하이킹 시작 전에 먼저 트레일 지도부터 꼼꼼히 살폈다. 숲속 트레일이 여러 갈래라 자칫하면 대나무 숲은 근처에도 못 가보고 돌다가 나올 수도 있다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다. 트레일 지도를 보면 대나무 숲은 E-26 지점에 있다(지도 참조). 주차장은 EP-19 지점이다.
22 대나무숲 트레일 지도트레일 지도. 대나무숲은 맨 위 EP-26 지점이다.
이곳에 차를 댔다면 들어왔던 길(인디언 트레일)로 되돌아 걸어나가EP-13으로 들어서는 게 관건이다. 이어 EP-23을 거쳐 EP-26 지점을 찾아가면 된다. 풍광 좋은 다른 트레일도 많은데 되돌아 올 때 걸어보면 좋다.
하이킹에 앞서 지도와 주의사항을 잘 보고 가는 게 좋다.
인디언 트레일 입구.
주차장에서 대나무 숲까지는 30~4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처음에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숲이 울창하고 주변 경관도 변화무상해 있어 걷는 재미가 제법 있다. 작은 개울과 울창한 숲을 지나다 보면 이따금 큰 바위도 만난다. 마지막 10분은 채터후치 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다.
여름이라 무성하게 자랐다. 쓰러진 나무 아래로 지나간다
채터후치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개울.
채터후치강은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 특히 레이크 래니어에서부터는 한인들 많이 사는 뷰포드, 스와니, 둘루스 일대를 적시고 가기 때문에 더 친근하다. 이어 라즈웰, 샌디스프링스를 거쳐 애틀랜타 서쪽을 훑으며 돌아 내려간다. 이 도심 구간 48마일이 모두 국립레크리에이션 지구(Chattahoochee River National Recreation Area:CRNRA)로 지정돼 있다.
대나무 숲을 찾아가는 사람들. 경건한 순례자 같다.
강변을 따라 얼마간 걷다보면 마침내 대나무 숲이 나온다. 애틀랜타 도심 근교에 이런 곳이라니, 신기하고 놀랍다. ‘익스플로러 조지아’는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만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소개했다.
쭉쭉 뻗어 오른 대나무숲. 조지아 공식 여행안내서에도 소개됐다.
죽림은 생각만큼 넓지는 않다. 그래도 하늘 높이 치솟은 중세 교회 첨탑을 보듯 높이에 압도당한다. 댓잎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하다. 굵은 대나무에 손을 대 보았다. 차갑다.
더 가까이서 보면 대나무 마디마디 새겨진 그림과 글씨들이 보인다. 대부분 변치 말자 다짐한 청춘의 낙서들이고 사랑의 맹세다. 저런다고 식지 않을 사랑이 어디 있으랴만, 젊어 한때인 그 마음만은 아름답다. 그럼에도 거슬렸다. 살아 있는 생명에 저렇게 칼질이라니,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못 할 짓이다.
대나무 줄기엔 이런 낙서도 많다.
# 현재 지구에는 모두 1250종의 대나무가 있다. 굵고 키가 큰 왕대, 얼룩무늬가 있는 솜대, 표피가 검은 오죽, 화살 재료로 썼던 이대, 산에서 흔히 보이는 조릿대 등이 우리가 흔히 듣던 대나무 종류다.
대나무는 이름과 달리 식물학적으로는 풀이다. 부름켜가 없어 부피 생장은 하지 않고 처음 땅에서 올라오는 굵기 그대로 평생 살아간다.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나이테도 없다. 또 다른 대나무의 특성 중 하나는 뿌리가 잔디처럼 옆으로 뻗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숲의 대나무는 모두 같은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 숲 전체가 한 포기라는 말이다.
지구에서 생장 속도가 가장 빠른 식물이라는 것도 대나무의 특징이다. 종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죽순은 한두 달이면 다 자란다. 기후 조건이 맞으면 하루에 50cm도 자라고 왕대는 하루에 1m 이상도 자란다고 한다.
막 솟아난 죽순.
밑둥치. 숲의 대나무는 모두 뿌리로 연결돼 있다.
대나무 숲을 다녀온 뒤 대나무 전문가(?)가 다 됐다. 몇몇 사람들에게 죽림 이야기를 하며 애틀랜타에도 그런 곳이 있다고 했더니 대부분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지아 30년을 살았지만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는 지인도 있었다.
채터후치 강변 대나무 숲은 그런 분들이 한 번쯤 가보면 좋을 것 같다. 도심 속에서 이 정도 대나무 숲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반갑지만 거기까지 찾아가는 강변 트레일도 꽤 매력이 있다. 봄 여름도 좋고 단풍 든 가을도 좋다. 하지만 역시 대나무는 겨울이다. 다른 나무들이 모두 잎을 떨군 뒤에도 위풍당당 홀로 푸른 대나무 숲, 상상만 해도 엄숙 장엄하지 않은가. 가끔은 조지아에도 눈이 온다 하니 그렇게 흰 눈 내리는 겨울날 나도 꼭 한 번 더 가봐야겠다.
애틀랜타의 명소 채터후치강. 카누와 카약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메모 : 샌디스프링스 대나무 숲을 가려면 인디언 트레일 입구(1425 Indian Trail NW, Sandy Springs)가 편하다. 주차 공간이 30여 대뿐이라는 게 변수다. 조금 더 걷겠다 생각하면 화이트워터 크릭 입구(4058 Whitewater Creek Rd NW, Atlanta)도 괜찮다. 주차장이 조금 더 여유가 있다. 주차비는 5달러. 채터후치 국립휴양지 연간 패스(40달러) 이용 가능하고 국립공원 연간 입장권(America The Beautiful, 80달러)도 유효하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 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