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에너지 가격 급등 살림살이 직격탄
각국 입장 따라 셈법 복잡해 종전 난망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 3일로 100일째를 맞았다. 유엔 발표에 따르면 지금까지 어린이 267명을 포함한 민간인 4149명이 숨지고 4945명이 다쳤다. 실제 희생자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전쟁이 끝날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러시아산 석유·가스와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길이 막히면서 우리 살림살이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 등 5가지 키 포인트를 정리한다.
①키이우 탈환, 돈바스 혈투
2월24일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한 러시아군은 사흘 안으로 우크라이나 북쪽 수도 키이우를 점령할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개전 100일이 지난 현재 키이우를 포기하고 대신 동부 돈바스(루한스크·도네츠크주) 지역과 남부 해안도시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
전선이 120㎞ 정도로 좁은 지역 전투에서 러시아가 계속 우세하면 우크라이나로서는 돈바스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러시아가 돈바스를 장악하면 2014년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로 직접 이어지는 육로를 구축해 우크라이나 남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공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영토의 10% 정도인 돈바스를 잃으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기대했던 휴전·평화 협상도 교착될 수 있다.
②러, 우크라 영토 잘라먹기
러시아는 태세 전환과 함께 전열을 재편해 동부의 기존 점령지를 거점으로 삼아 점령지를 서서히 조금씩 늘려가는 모양새다. 키이우, 하르키우 등 대도시에서 철수했지만 점령한 소도시에서는 주민, 행정체계, 문화를 러시아에 통합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헤르손에서는 5월부터 러시아 루블화가 법정화 폐로 지정됐고 마리우폴, 헤르손, 자포리자에서는 주민에게 러시아 여권이 쉽게 발급되고 있다. 돈바스 지역도 초토화 뒤 러시아에 넘어간다면 헤르손, 마리우폴과 같은 과정을 걸을 것으로 예상된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물리적 공격과 문화적 침탈을 아우른 이 같은 공세를 제노사이드(표적 집단 말살)로 비난했다.
③둘로 쪼개진 세계 ‘신냉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안보 지형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역사적 변수’가 됐다. 우크라이나에서 울린 총성은 굳건했던 미국 ‘1강 체제’에 도전하는 러시아와, 이에 중국이 가세하면서 세계는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러시아·중국이 구심점이 된 ‘반미 진영’으로 나뉘는 신냉전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이유로 내세운 것중 하나는 나토의 동진이다. 현재 동유럽에서 나토가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우크라이나 전쟁 수개월 전보다 10배가량이 늘어난 4만 명이다. 70여 년간 군사적 중립국 지위를 고수했던 핀란드와 스웨덴도 군사 비동맹주의라는 원칙을 스스로 깨면서 나토 가입을 신청했다. 러시아는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은 나토의 동진이라며 핵 대응을 포함한 강경 대응을 예고해 동서 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여느 때보다 높아졌다. 또 서방 동맹에 대항해 중국이 러시아의 가장 큰 우군이 됐다.
④전세계 밥상 때린 포탄
2년여에 걸친 팬데믹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닥친 전쟁으로 전세계 공급망의 혼란이 가중됐고 인플레를 수십 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우크라이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한 흑토지대로 ‘유럽의 빵공장’이라고 불릴 만큼 밀, 옥수수, 해바라기씨유 등이 풍부하게 산출된다.
전쟁으로 곡물 수출이 어려워지자 국제 가격은 연일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주요 수출 통로였던 흑해 항구를 봉쇄하는 바람에 곡물 약 450만t이 컨테이너에 쌓였다. 서방은 러시아가 전세계를 상대로 식량을 인질로 잡고 있다며 봉쇄 해제를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자국에 대한 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곡물뿐 아니라 육류 등 먹거리 전반으로 인플레가 번지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육류는 17%, 밀 등 곡물은 34%, 식물성 기름은 46%나 급등했다. 대러시아 제재 우려로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해 130달러 선까지 넘나들었다.
⑤복잡한 ‘종전 방정식’
전쟁은 우크라이나에서 터졌지만, 안타깝게도 종전 결정권은 우크라이나 국민에게는 없는 듯하다.열강들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호에 게재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게 끝날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서방 국가들이 각자 입장을 내세우며 빨리 전투를 중단하고 협상을 시작하라는 ‘평화팀’과 러시아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정의팀’으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평화팀’에 속한 독일은 휴전을 요구하고 이탈리아는 정치적 합의를 위해 4단계 계획을 제안하고 있고 프랑스는 러시아가 굴욕을 겪지 않는 미래 평화 협정을 꺼냈다. 반대편인 정의팀에는 영국의 목소리가 가장 크고 이어 폴란드, 발트해 연안 국가들이 뜻을 함께 하고 있다.
미국의 입장은 모호하다. 도움을 주되 무제한은 아니라는 선을 긋고 있다. 예를 들어 포를 제공했지만 우크라이나가 요구하는 장거리 로켓은 주지 않는 식이다.
셈법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국가가 러시아의 완패를 바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완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패전한 러시아가 나토를 공격하거나 화학무기와 심지어 핵무기까지 쓸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6일자 ‘(우크라이나 전쟁)어떻게 끝날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각국 정치지도자들이 우크라이나 승리를 원하고 있지만 표면 아래에는 승리의 형태는 물론 미국, 유럽, 우크라이나에서 승리의 정의가 같은지를 두고 분열이 있다고 진단했다. 정구현 기자